인천산재병원 전통공예실의 도자기 진열대에는 수많은 산재근로자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산재근로자들이 고통을 참아가며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빚어낸 작품이기에 이곳 도자기에는 본연의 멋을 넘어선 또 다른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그것은 아마 재기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애정이 간절하게 묻어 나오는 것이라 생각된다. 천천히 작품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면 유달리
스물아홉 나이에 산업재해로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된 한 청년이 있었다. 한순간의 사고는 그의 수많던 꿈과 희망을 모두 앗아갔다. 좌절, 죽음 등 어두운 그림자가 늘 그의 곁을 맴돌았지만 그는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는 해볼 수 있는데까지 해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청년은 ‘장애인도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써 일어서야
아직도 많은 근로자들이 작업장에서의 생활과 집에서의 생활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장에는 각종 기계 등 위험요소가 산재해 있어 주의를 해야 하지만 집은 그런 위험장비가 없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때문에 작업장에선 철저히 안전수칙을 지키던 근로자도 집에선 그저 편한 방식으로 가사 일을 돕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안전이 생활화되지 못한
1952년 5월 충북 청원의 한 시골, 김충현씨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가정의 5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명석한 머리로 어려서부터 촉망받던 그는 마을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서울로 유학을 가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쳤으며 1978년 국내유명 주방가구 업체에 입사했다. 이후 지금의 아내를 맞이해 1남 1녀를 둔 가장으로 행복한 삶을 이어
인천산재병원에는 ‘비밀의 화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재활공학연구소 뒤편에 있는 특수재활요법 원예교실 실습장. 이곳에선 소사나무, 러브체리 등 수백여종의 화초가 저마다의 아름다운 향을 피어내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꽃이고 나무임에도, 이곳 화초들의 향과 모습은 여느 화초들보다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 이유는 아마 이곳 화초들 모
2004년 부산의 모 병원 신축 공사현장 지하 3층. 당시 그곳에선 현장 근로자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안전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어느 현장에서나 흔히 열리는 안전교육이었지만 그날 이곳의 분위기는 일반적인 현장과는 달랐다. 근로자 모두가 경청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눈물을 쏟아내는 이도 있었다.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날 생전 처음 강연을 맡은
1981년 10월의 어느 날. 유원형(당시 31세)씨는 강원도 정선의 모 광업소에서 일하고 계신 큰 형님으로부터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재탄부(광부) 자리가 하나 났으니 얼른 오라는 것이었다. 광부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그래도 임금이 꽤 높아 당시 만해도 인기가 높은 일자리였다.결혼을 하고도 아직 번듯한 직장을 갖지 못한 막내 동생을 걱정하던 큰 형님이 애를
1997년 11월, 승승장구를 거듭해오던 한국경제에 IMF라는 사상초유의 위기가 닥쳤다. 갑작스런 이 폭풍에 유수의 기업들과 건실했던 중소기업들이 한순간 무너져 갔다. 심지어 동네 소규모 점포마저 연이어 닥친 불황에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이런 상황 속에 수많은 가장들이 평생을 바친 직장을 등지고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 거리를 헤매야 했다. 봉평열(62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 태백중앙병원. 이곳에는 1970·80년대 광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광부들이 상당수 환자로 입원해 있다. 한때 한국경제를 짊어지고 힘차게 갱내를 누비던 이들이었지만 이제는 노쇠한 노장이 되어 병원 한 켠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랜 광부생활로 생긴 진폐증은 이들에게 사실상 시한부 인생을 선고, 인생의 마지막
때늦은 함박눈이 전국을 뒤덮은 3월의 어느 날. 이상용(47)씨는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데도 불구하고 론볼 경기장 점검에 나섰다. 경기장으로 가는 진입로가 얼진 않았는지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갈 배수관은 괜찮은지를 꼼꼼히 살폈다. 그가 이처럼 이 경기장에 정성을 다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이곳은 산재근로자와 충북지역 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체육공간을 만
3월 25일 인천중앙병원 전통공예실. 긴 작업대 위에 놓여 진 한 도자기를 두고 여러 산재근로자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어쩌면 이렇게 선이 고울까”, “표면에 모난 곳 하나 없네” 등 연신 칭찬이 끊이질 않는다. 이런 쏟아지는 칭찬에 도자기 주인 김남철(53)씨는 밝은 웃음으로 화답한다.아픔을 잠시나마 잊어보자
산재근로자 성낙후(59)씨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 주변을 밝게 하는 사람,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 등이 그것. 이들은 모두 그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벗들이 붙여준 것 들이다. 지인들은 서른 넷 젊은 나이에 산재를 입고도 그 고통을 이겨내며 극복의 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현재 장애우
절룩거리는 다리와 굳은 팔을 갖고 있는 보험설계사가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성치 않은 몸으로 굳이 왜이 일을 택했냐?”고 묻는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사람을 만나야 하는 보험설계사 일을 불편한 몸으론 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 섞인 물음에 그는 웃으며 답한다. “이런 몸이기 때문에 일부러 하는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