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한창 추운 겨울의 어느 날. 모 플라스틱 분쇄기 생산회사에 다니던 최영호 씨는 대전 신탄진의 한 업체로 제품 배달을 갔다. 명색이 서울사무소의 소장이었지만, 작은 회사에선 누구나 열심히 일을 해야한다는 신념으로 늘 앞장서던 그였다. 열정이 과했던 것일까. 그곳에서 그는 높이 1.5미터, 무게 800kg 정도의 플라스틱 분쇄기를 직원들과 옮기
환한 미소가 가득한 앳된 얼굴, 공을 주시하는 예리한 눈빛, 반대편 코트를 향해 매섭게 내리꽂는 스트로크, 테니스코트를 울리는 당찬 기합 소리. 처음 마주친 김민화(36세)씨의 모습은 패기 넘치는 여자 테니스 선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향해가면서 또 다른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휠체어였다. 휠체어에 의지한 몸으로 그렇게 코트를
1980년 전남 목포 출신의 시골 청년은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푼 꿈을 안고 상경했다.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휘황찬란했다. 순식간에 그에게 부귀와 영예를 듬뿍 안겨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청년은 얼마 되지 않아 차가운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배움이 부족하고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서울은 그리고 세상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지난 9월 30일 서울 aT센터. 이곳에선 세계 57개국의 장애인 국가대표 기능인 445명이 참가한 가운데 ‘2011 제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치열한 경합의 현장에 산재근로자 임금천씨(인천산재병원 특수재활교실 소속)도 있었다. 그가 참여한 종목은 목공예. 주어진 과제는 5시간안에 기러기 모양의 수저를 만드는
1950년대 후반, 문성근(54세)씨는 전남 보성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던 시절이었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생활 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논일, 밭일, 공장의 허드렛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자 광주광역시에 있는 직업훈련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장일을 배웠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청운의 부뿐
2009년경 경기도 안산 인근 건설현장에서 정두환씨는 소문난 만능 일꾼이었다. 목공, 미장, 용접, 콘크리트 타설 등 못하는 게 없었다. 심지어 건설 일용직 근로자 중에선 드물게 도면설계까지 할 수 있었다. 정규 교육과정 등을 통해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15년여를 건설현장에서 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숙련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일을 하건 제대로
청년은 스무 살 한창 나이에 감전재해로 왼쪽 팔과 왼쪽 다리를 잃었다. 또 사고는 그가 소중히 키웠던 꿈과 희망을 순식간에 절망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청년에게 남은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동정 섞인 세간의 시선, 자살로 가득한 잡념뿐이었다. 하지만 청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겐 스스로 목숨을 끊을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
지난 1994년 어느날 서울의 모 병원 건축현장. 건물 사이의 통로에서 H빔을 고정시키기 위해 한 근로자가 두께 5cm, 길이 1.5m 정도의 철판을 들려하고 있었다. 약 100kg의 무게를 가진 철판이었지만 평소 해오던 일이었기에 아무 조치없이 철판을 세우려 했다. 그리고 다리를 구부려 철판 윗부분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견디지 못할 통증이 허리에 전해졌
기계의 오작동으로 협착, 추락재해 당해 2010년 어느 겨울날. 한 근로자가 모 자동차 부품제조공장에서 페이로더를 운전하면서 무거운 적재물을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근로자는 하루 동안 주어진 작업량을 채우고 사무실로 복귀할 채비를 갖췄다. 그리고 장비를 원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조종장치를 위로 올리고 운전석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장비 밖으로 몸을 빼
1960년대 후반. 군대를 갓 제대한 김경준씨는 강원도에 위치한 대한석탄공사의 한 광업소에 운전직 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당시 그의 노모는 운전이 위험한 일이라며 간곡히 만류에 했었다. 하지만 가진 기술이라고는 운전밖에 없었기에 그는 노모의 걱정을 뒤로 하고 입사를 단행했다. 그는 군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했기에 운전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또 당시만 해도 운전
경북 경산에 소재한 경산시장애인종합복지관. 최근 이곳에선 ‘산재근로자 사회적응프로그램’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산재근로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원만한 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한 문화체험, 직업체험, 체육활동의 등의 강좌가 개설 돼 높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복지관 곳곳에서 많은 산재근로자들이 산재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땀을 흘리
2008년말 천재수씨는 인천에 위치한 모 자동차 부품 제조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사장을 비롯해 직원 모두가 성실히 일한 덕에 건실한 구조를 갖춘 곳이었다. 하지만 경기불황과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이어지며 회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직원들이 하나 둘씩 감원됐다. 그리고 천재수씨에게도 그 순간이 왔다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 주택가의 한 세탁소. 겹겹이 지어진 빌라촌에 가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외진 곳임에도 이곳엔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빽빽이 들어찬 세탁물, 간간히 증기를 뿜어내는 다리미, 쉼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 등 아무리 둘러봐도 여느 세탁소와 다를 바 없는 곳이다. 그런데 왜 손님들로 항시 북적이는 것일까? 그 해답은 손님들
10월의 어느 날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 위치한 예삐꽃포장학원. 가을의 따사로운 오후 햇살이 창을 통해 내리쬐는 가운데 꽃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중년의 한 남자가 정성스레 꽃을 다듬고 있다. 손길은 다소 거칠지만 잎 하나를 정리할 때도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모양새가 얼마나 꽃을 사랑하는지 느끼게 한다. 이 손길의 주인공은 올해 53살의 김명제씨다.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던 20대 시절 김원기(43)씨의 꿈은 자신만의 사업장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테리어를 좋아하고, 인테리어 시공을 잘한다는 것만으로는 사업장을 꾸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비록 작은 사업장이더라도 관리와 운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나이가 서른을 넘어갈 즘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김포시에 위치한 모 목공회사의
서울 사당동에 위치한 한국직업전문학교, 이곳에선 올해부터 산재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의 지원 하에 산재근로자들의 재취업을 돕기 위한 컴퓨터, 인터넷 등 IT강좌가 개설 된 것. 산재를 딛고 새로운 삶을 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산재근로자들이 수강생이다 보니 이곳의 강의 분위기는 여느 직업전문학교
손병복 회장의 일과에는 휴식시간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쉴 틈이 없다. 논산시장애인연합회장을 필두로 (주)희망우리사랑서비스, 논산시지체장애인편의지원센터 등 다수의 취약계층지원사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반신마비라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는 지역 곳곳을 찾아다니며 장애인, 노인 등 지역 내 취약계층을 돕고 있다. 이런 그에게 주변 사람들은 &ldq
광주의 모 실내수영장. 유규성(50)씨가 들어서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오른손과 오른발이 없는 장애인이 수영을 하러 온 것에 모두가 놀라워 했던 것. ‘저런 몸으로 어떻게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하는 눈빛들이었다.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유규성씨는 풀로 향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
박영일씨는 하얀 병실 침대에 앉아 몇 시간째 멍하니 엄지와 검지만 남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이 손이 내 손이 맞기는 한 것일까?’ 등 자신을 부정하는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다. 불과 2주전 열심히 살아보자는 각오를 되새기며 공장에 입사했던 그였다. 헌데 지금 그는 손가락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그 하나의 이름 안에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책임과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 등 막중한 의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책임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치열한 삶의 전쟁터를 홀로 누벼야 하기에 아버지의 삶은 외롭고 힘겹다. 하지만 아버지는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가족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