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그 하나의 이름 안에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책임과 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 등 막중한 의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책임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치열한 삶의 전쟁터를 홀로 누벼야 하기에 아버지의 삶은 외롭고 힘겹다. 하지만 아버지는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가족들을 돌아보며 웃음을 짓는다. 내 가족이 웃을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아버진 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혹여 쓰러져도 금새 웃으며 다시 일어난다. 이준규씨(53)도 바로 이런 우리나라의 아버지였다. 척추가 골절될 정도의 산재를 입고도,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적치작업 중 안전사고 입어

 

2000년 3월, 당시 이준규씨는 인천에 소재한 H유리생산회사에 재직 중이었다. 그곳에서 그가 맡은 일은 자동차용 유리창을 생산하고, 이를 적치하는 일이었다. 공정 자체가 고열처리 공정이다 보니 한 순간의 방심이 큰 사고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안전장비의 착용은 물론 안전작업수칙을 철저히 지켜가며 작업에 임했다.

하지만 사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발생했다. 완성된 유리창을 파레트 위에 옮겨 놓는 작업을 하다 파레트의 홈에 발이 빠져 넘어지고 만 것. 유리창에 흠집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파레트 위에 큰 종이를 깔아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때문에 파레트의 홈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발이 빠지게 된 것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그저 넘어진 것이기에 그는 다시 쉽게 일어 설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특히 허리 쪽에 극심한 통증이 와 비명만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진다”

병원에서의 진단결과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겨우 파레트 위에서 넘어졌을 뿐인데 척추골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걷기는 커녕 발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당시 나이 마흔 세 살, 한 창 일할 나이였다.
사랑스런 아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초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생각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책임져야할 가정이 있는 가장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몸이 돼버렸다. 육체적 고통을 떠나 가슴을 짓누르는 형언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 그를 휘감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에만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가정도 무너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치료에 임했다.

2년에 걸쳐 6번의 대수술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수술과 함께 재활치료에도 매진했다. 그 결과 절뚝거리기는 하지만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전통 두부제조 기술 배워 재기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됐지만 산재 5급의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허울뿐인 아버지가 된 것 같은 자격지심에 가족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그는 늘 집 밖을 맴돌았다. 그러던 차 한 지인과 함께 낚시를 할 겸 찾은 강원도 양구에서 그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한 시골집에서 두부를 빚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방식도 옛날 방식 그대로 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맛 또한 옛날 맛 그대로였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이 기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매주 서너 번씩 인천에서 양구를 오가는 강행군을 했다. 힘들고 고됐지만 이 기술을 익혀 꼭 창업을 할 것이란 희망을 품고 견뎌냈다. 수개월에 걸쳐 두부를 빚는 기술을 배웠다. 또 요리학원도 다니며 정식으로 요리법도 배웠다. 이제 모든 기술적인 준비는 끝났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당장 살기도 막막한 집에 창업할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는 노릇.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 근로복지공단에서 시행중인 산재근로자 창업지원사업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는 공단의 지원 속에 인천 연수구 동춘동에 ‘그 때 그 집에 그 맛! 재래식 손두부’라는 자신만의 가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아직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장사가 그리 썩 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아버지로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부디 다른 산재근로자들도 이준규씨처럼 자신이 아닌 가족을 먼저 둘러보기를 바란다. 가족을 위한 사랑은 분명 당신에게 산재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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