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일씨는 하얀 병실 침대에 앉아 몇 시간째 멍하니 엄지와 검지만 남은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이 손이 내 손이 맞기는 한 것일까?’ 등 자신을 부정하는 생각들이 계속 떠올랐다. 불과 2주전 열심히 살아보자는 각오를 되새기며 공장에 입사했던 그였다. 헌데 지금 그는 손가락 2개만이 남은 왼손을 거머쥐고 병실에 앉아있었다. 스물 셋 한창 나이에 잃어버린 손가락 세 개는 남은 삶 전부를 잃어버린 것과 같았다.

슬픔을 가누지 못해 점점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을 때 손과 발 등에 부상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그에게 건강하게 일할 근로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그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이들처럼 근로자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지 않게 하는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길로 그는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렇게 10년여의 세월이 지났고, 지금 그는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의 새로운 수장이 됐다.

입사 보름 만에 안전사고 입어

1998년 4월초 박영일씨는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모 방위산업체에 밀링공으로 입사를 했다. 직장을 얻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찼던 첫 출근 길. 하지만 이런 설레임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공장 내에 밀링기계가 없었던 것.

밀링공으로 뽑혀서 왔는데 정작 그가 다루어야할 밀링기계가 없으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당혹감에 빠져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그를 공장관계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프레스기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관계자는 프레스기 작동법을 간단히 설명해주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안전교육도 없는 허술한 직무 교육이 서너일 이뤄지고 그는 홀로 작업에 배치됐다.

그렇게 보름여의 시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서툰 손놀림으로 간신히 작업을 이어가던 그에게 결국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기계 오작동으로 인해 왼손이 프레스에 깔린 것.

엄지와 검지만 남은 왼손

의사는 눌려 터져버린 그의 왼손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목을 자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돌아섰다. ‘손목을 자른다니?’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살려달라며 매달렸다. 의사는 다시 검사 시트와 스물 세 살 된 청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뒤 의사는 입을 열었다. “환자가 아직 젊으니 최선을 다해 치료해 봅시다”

그렇게 시작된 수술의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다행히 엄지와 검지를 건진 것. 하지만 청년은 이를 성공이라고 받아들기가 무척 힘들었다. 손가락 세 개를 잃었다는 것이 마치 남은 삶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재해의 휴유증은 수년간 40여번의 수술이 이어질 만큼 컸다. 그리고 통증이 커질수록 안전장비는커녕 안전교육 한 번 실시하지 않았던 회사에 대한 원망도 점점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마음을 전부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자신을 다시 받아줄 곳은 본래 회사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기대는 얼마 못가 산산이 부서졌다. 회사는 부상을 이유로 끝내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산재근로자 권익보호에 ‘앞장’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담과 실의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찌 살아야 할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은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불러 왔고, 그의 삶을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그가 있던 병원에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라는 단체가 방문 상담을 하러 왔다.
그들은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면서 산업재해가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려졌다. 또 근로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친절한 설명도 설명이었지만 그는 그들의 모습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자신처럼 손이나 발이 없는 산재근로자들이었던 것이다. 산재의 고통을 딛고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활동을 모두 무료로 진행하기 위해 자신들끼리 공동체를 만들어 DM발송 등의 일을 한다는 말에 놀랐다. 그길로 그는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앞장서서 산재근로자의 권익을 위한 운동과 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게 10년여이 지난 지금 그는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의 대표가 됐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다. 더 이상 산업현장에서 그 어떤 근로자도 다치지 않는 것. 오늘도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전국의 현장과 병원을 돌며 ‘산재예방’을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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