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모 실내수영장. 유규성(50)씨가 들어서자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오른손과 오른발이 없는 장애인이 수영을 하러 온 것에 모두가 놀라워 했던 것. ‘저런 몸으로 어떻게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하는 눈빛들이었다.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유규성씨는 풀로 향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모습에 의구심 가득했던 눈빛들은 곧 경탄으로 바뀌었다.

그가 수영을 마치자 주변의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그들은 물었다. 어떻게 한 손과 한 발만으로 수영을 할 수 있냐고.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답했다. “저는 한 손과 한 발로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수영을 하는 것입니다”

감전재해 입어

 

유규성씨가 사고를 당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전남 구례 농공단지에 위치한 모 공장에서 고압전기 이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해당 현장이 공장을 신축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작업은 늘 정전상태로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위험성도 그리 높지 않았다.

사고가 난 그날 그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작업시작 전 회의를 마치고 전 근무자들과 교대를 하여 작업에 투입이 됐다.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그는 전선에 손을 갖다 댔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이 그의 몸에 전해져왔고, 연이어 수미터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오른손과 오른발 끝에선 피가 솟구쳐 나왔다.
22,900KV에 달하는 고압전기가 그의 몸을 통전한 것이었다.

전 근무자들이 점검 차 잠시 전원을 켜놓았던 것을 유규성씨를 비롯한 교대근무자들에게 전달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보조기를 차고 다시 세상에 나오다

비록 끔찍한 사고였지만 그래도 그에겐 천운이 따랐다. 그나마 위험성이 다소 낮은 오른손-오른발 통전경로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목숨을 건졌을 뿐 그가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했다. 피부와 신체조직 등에 큰 상해를 입은 오른손과 오른발을 관절 밑으로 절단해야 했던 것.

멀쩡했던 자신이 하루아침에 한쪽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또 전원을 켜놓고도 말 한마디 해주지 않은 작업자들에 대한 원망과 정전작업이라는 것에 방심하고 절연용 보호구의 착용을 소홀히 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도 커져만 갔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가지고 되새기지 말자고 결심했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두고 이렇게 쓰러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절단 수술 6개월 만에 보조기(의족, 의수 등)를 차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었다.

“산재자 권익 신장위해 노력할 것”

보조기를 찬 장애인이 취업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에 그는 주유소를 열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해보는 사업은 만만치 않았다. 작은 주유소 하나를 운영하는 것에도 경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날부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 인근 대학교의 유통학과에 들어갔다. 그렇게 한 번 배움의 물꼬가 터지자 학업에 대한 열의를 멈출 수가 없었다. 연이어 경영학 석사와 행정학 석사까지 취득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자신이 얻은 배움을 산재근로자 등 중도장애인들의 권익을 신장시키는데 쓰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이후 그는 산재근로자 단체, 지역 봉사활동 단체, 국제로타리클럽 등에 가입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업도 지속적으로 확장시켜 중앙전설(주), 중앙건설(주) 등의 법인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밖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자 수영이나 골프 등의 스포츠 활동도 꾸준히 했다. 특히 수영의 경우 수차례 걸쳐 한강을 도강했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유규성(50)씨의 향후 계획은 강단에 서는 것이다. 안전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산재근로자들이 다시 밝은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그의 이런 계획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 그 덕분에 용기를 되찾는 산재근로자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