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지금은 세계를 보는 눈이 더 이상 서구 담론의 전유물일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세상이 너무나 복합적이어서 근대주의 이성 담론만으로도 부족하고, 소위 갖가지 포스트 담론으로도 세계를 해석하기에도 적절치 못하다. 세계는 여전히 이성과 국가 그리고 자본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들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난다.

남성과 여성을 통째로 하나의 집단으로 규정할 수도 없고, 과거 부르주아네 노동자네 하는 단일화 집단이 지금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성의 낙관론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참담하게 무너져 가고 있고, 세계는 온갖 잡다한 정체성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모습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하루하루 일상이 근대성이 해석하거나 그것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을 목도하는 것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민주노총이 부르짖는 계급주의는 아무런 울림이 없고,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라고 일갈한 예수가 설파했다는 그 진리 또한 이 사회에서 약발이 떨어진지 오래되었다. 그 단일 진리 중심의 세계 즉 내 눈으로만 보고 규정하는 세계는 이미 ‘눈 먼 자들의 도시’일 뿐이다.

옛날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면서 세계 해석에 대한 고민을 한 번 해보자. 많이들 아는 황진이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는 지족선사라는 중 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면벽 수행을 10년이나 한 고승이다.

그런데 그는 황진이의 노골적인 유혹에 결국 황진이와 몸을 섞는다. 그 지족선사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재미도 있고 스토리 구성할 만한 소재도 다양하고 해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소설로 쓰여 졌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 모든 소설가는 지족선사를 수행에 실패한 땡추 비슷하게 그렸다. 반면에 황진이의 노골적인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 않는 서화담은 매우 뛰어난 선비로 그렸다.

은연중에 불교를 무시하고 아래로 보면서 반면에 유학은 높이 치는 조선 시대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 그 위에서 이성 중심의 단일적 해석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 근대주의의 시각과 맞아 떨어지면서 생긴 일이다. 그렇다면 유교적이거나 서양 근대적이지 않은 시각으로 해석해보면 어떻게 달라질까? 이를 불교적으로 한 번 해석해 보자.

지족선사가 밀교적 세계관을 잘 이해한 고승이라면, 그는 겉으로 하는 규정과 판단에 개의치 않는다. 그가 황진이와 몸을 섞은 것은 그렇게 사람을 꺾어보려는 저 아둔한 황진이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뭣이 중헌디 ~~” 한 마디 하고 그를 거두어 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10년 면벽 한 후 깨달은 것은 탐진치(貪瞋癡)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가 다를 바 없고, 육체와 정신이 따로 일수도 없으며,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이 따로 일수도 없다는 것이다. 돈 많이 벌게 해주십사 빌고, 복 많이 받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기복 신앙과 모든 욕망과 집착을 끊으려 수행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출가하는 것과 대처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족선사의 마음에 황진이 그가 그렇게나 자신의 몸을 가져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까짓 것 이 한 몸 던져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까짓 것 그게 머시라고’ 그것이 틀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무량의 세계라는 것이다. 지족선사는 그것을 깨달은 고승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해석이고, 맞을 수도 그를 수도, 맞지도 그르지도 않을 수도 있는 해석이다.

실제 사실은 어찌 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 선사만 알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도 모를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리는 하나라는 것에 반하는 불교의 세계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으니 색즉공이고 공즉색인 것이다. 만약,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서화담은 쫌팽이다. 서구의 근대주의는 그 쫌스러움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쫌팽이다. 서구 근대주의라는 것은 오로지 목적과 효율 그리고 발전만을 위한 그야말로 “뭣이 중헌디”를 모르는 비(非)인간적 세계관이다.

서구 근대주의에 의하면 역사는 발전하는데 그 원동력은 이성의 힘이다. 그에 맞는 모든 행위가 다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시보다는 산문이 수준이 높은 것이다. 학문의 꽃은 과학이고, 모든 인간의 행위는 과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이성과 과학을 토대로 발전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글 중에서도 산문을 높이 쳤다. 시는 산문과 달리 감성적이고, 넌지시 보여주고, 서로 달리 나눠보는 것이라 수준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유럽에서와는 달리 고대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감성과 시를 훨씬 높이 평가했다. 고대 인도에서는 종교 경전조차 대부분이 시였으니, 종교 또한 보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이 가능하였다.

해석의 여지를 중시하고, 그 위에서 각 사람의 상황과 처지와 맥락을 들어주고 고려해준다는 것이다. 정말, 어느 영화에서 부르짖은 것처럼, 지금 ‘뭣이 중헌디’를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들어주고 헤아려주는 것이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가 돈만 많이 버는 것보다 비교할 수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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