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교수

 

역사적 화해는 정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일로 하는 것


요즘 몇 년 동안 역사 문제가 사회적 이슈 중의 최상층에 속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건국절 논란이 그렇고, 위안부 사과 문제가 그렇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문제는 이런 여러 이슈 중에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문제다. 이 문제는 역사 해석과 화해에 대한 문제 풀이의 시금석이 된다. 찬찬히 곱씹어 볼 문제다.

베트남 중부 빈딘성에 가면 김치를 만날 수 있다. 베트남전 때 한국군이 통조림으로 가져 와 인민들과 나눠 먹을 때부터 그곳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 때는 전쟁 중이었지만, 인민들과의 교류는 폭넓게 이루어졌다.

베트남전은 일부 시점을 제외하고는 전면전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학교를 다니며,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게릴라전 형태로 싸움이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래서 한국군은 비록 용병이었지만, 베트남 인민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이 용병으로 왔지만, 그 나라 사람들과 굳이 사이를 나쁘게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어쩌다 한국군은 양민 학살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을까?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 또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무력 앞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가냘픈 인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전쟁터로 나아갔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만들어진 비극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참전국으로 나선 한국 정부가 나서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일이 일단락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더 우선인 것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당사자가 먼저 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나서 역사학자를 비롯한 관계있는 일을 하는 시민들이 나서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양심적 시민 조직이 나서야 한다고 본다. 정부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해자인 피해자는 어디서도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 민간인 피해자는 아무리 숨을 쉬어도 그 숨은 영원히 그치지 않는 한숨이다. 오로지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사는 것은 조국이요, 민족이요, 해방의 이름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해원은 조국과 민족과 해방의 큰 이름 속에서 짓눌려 살아온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함이다.

그리고 그 사과는 그들에게 직접 가해를 가한 한국군 참전군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런데 그 참전군인은 지금 고개를 들고 나설 수가 없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국가가 주도하는 폭력에 의해 끌려나가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했을 뿐인데, 그래서 그들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분명 피해자인데...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그들이 나서야 한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다시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우리는 그들이 한두 사람일지라도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군인을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날의 참상을 대중에게 직접 전하는 강연회는 자제해야 한다. 역사의 진실 규명, 얼마나 잔인하게, 얼마나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밝히는 것에 최종 목표를 둬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그 실체적 진실을 만천하에 다 까발리는 것과는 다르다.

설사 실체적 진실이 하나의 역사로서 존재한다 할지라도 참상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또 다른 피해자인 참전 군인들과 그 생존자들과 만나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일 수는 없다. 국가가 먼저 하고, 이제 당사자가 사과하고 받아주고 화해하면, 시민들이 그 뒤를 받쳐줘야 한다. 정성이 배어나고, 감동이 퍼질 때 비로소 화해는 이루어진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천천히 한 걸음씩, 삼보일배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러면 그 증오비에 새겨진 ‘증오가 하늘에 닿아 ...’가 ‘정성이 하늘에 닿아...’로 바뀔 수 있다. 정성을 다 하지 않으면 그것은 정치일 뿐이다. 역사적 화해는 정치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일로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정성과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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