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대한산업안전협회장

 

유난히도 길었던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추석 연휴도 끝났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필자는 지난해 여름 가족과 함께 방문한 스위스를 떠올리곤 한다.

스위스 수도 베른(Bern)에서부터 프랑스 북동부 알사스(Alsace) 주 콜마르(Colmar)까지 여행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을 통해 스위스의 낙농업, 특히 치즈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스위스 치즈는 안전관리 이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이 구멍이 숭숭 뚫린 에멘탈 치즈의 모양을 토대로 만든 ‘스위스 치즈 모델(The Swiss Cheese Model)’이 대표적인 예다.

이 모델의 핵심 개념은 “일련된 여러 실수들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하나의 사고가 난다”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자세히 설명하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구멍이 불규칙하게 뚫려 있는 몇 개의 치즈 조각들을 일렬로 세워놨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젓가락을 단 하나의 구멍으로 관통시켜 보자.

두 세 개의 치즈 조각이라면 구멍들 사이로 젓가락을 관통시킬 수 있는 확률이 높다. 하지만 치즈 조각이 여러 개라면 하나의 구멍으로 관통시키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또한 각각의 치즈 조각에 있는 구멍 수가 적고, 그 크기와 위치도 제각각이라면 젓가락이 통과할 확률은 더욱 낮아진다.

재해 발생 과정을 스위스 치즈 모델을 활용해 설명할 수 있다. 젓가락이 여러 겹의 치즈를 통과하는 것을 ‘재해 발생’, 각각의 치즈 조각을 ‘작업 방법’, 치즈 구멍을 ‘위험요인’, 치즈 구멍의 크기를 ‘발생 가능성’이라고 가정해보면 재해는 단 하나의 불안전한 행동(또는 불안전한 상태)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최근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도 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위험 업무를 외주화하면서 ‘관리 감독’이라는 치즈 조각이 사라졌고, 안전보다는 비용 절감을 추구하는 경향 때문에 커다란 치즈 구멍이 생겼다. 여기에 안전을 등한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는 그 치즈 구멍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재해를 예방하는 첫 번째 치즈 조각인 ‘우리사회 안전의식’부터 다음 치즈 조각들인 ‘사업주의 안전경영 마인드’, ‘근로자 안전의식’, ‘안전관리시스템’ 등과 같은 치즈 조각이 더 많아져야 한다. 더불어 치즈의 구멍을 없애거나 작게 만드는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매년 9만여 명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재해자 수는 분명 줄어들 것이다.

이런 노력들을 하면서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안전관리의 기본, 그리고 핵심은 결국 사람이라는 인식을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없이 치즈 조각에 대한 관리 만을 강화하다가는 헛바퀴만 돌리게 된다. 전체의 틀과 구조를 바꿔서라도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안전문화는 결코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정착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끊임없는 관심과 적극적인 투자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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