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효 대림산업 안전보건팀 차장

 

삶(life)이라는 말은 한자로 활(活)이라고 씁니다.

활(活)은 물(水)이 콸콸 소리(舌)를 내며 흐르는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한 형성(形聲) 문자입니다. 흐르는 물이 물속의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감싸고 휘돌면서 물살이 느려집니다.

물이 잘 흐르도록 개울 속 바위를 모두 들어내면 물거품을 만들며 바위를 휘도는 물의 정체(停滯)는 해소되지만 개울의 생태는 오히려 악화됩니다.

바위를 휘돌면서 만들어진 물거품이 물속으로 산소를 공급해서 물의 생태를 건강하게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장애물처럼 불쑥불쑥 등장하는 많은 것들도 마치 개울 속 바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경남 창녕의 아름다운 두메산골에서 보냈던 유년기의 기억입니다.

창녕읍에 장이 서는 날이면 아버지는 계란, 산나물, 약초 등을 지게 발채에 담아 장터로 가셨습니다. 읍내까지는 십리가 넘는 거리였고 그 길에는 계성천(桂城川)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 몹시 후텁지근하던 날 아버지를 따라 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내린 소낙비로 하천이 불어나 징검다리가 물속에 잠겨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지겟작대기로 지게를 받쳐두고 근처에서 제법 큰 짱돌들을 주섬주섬 주워 빈 지게 발채에 담으시더니, 꼬맹이 아들까지 지게에 들어 올려놓고 아이의 고사리 손에 지게 꼬리를 단단히 쥐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묵직해진 지게를 다시 짊어지신 아버지는 허벅지까지 차오른 계성천을 지겟작대기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건너갔습니다.

넘실대는 지게 위에서 몸을 잔뜩 오그린 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흘러내리는 사나운 흙탕물을 보면서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어깻죽지를 고사리 손으로 한껏 움켜쥔 채 영원 같은 시간이 흘러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듬직해 보였습니다.

계성천을 건너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이 진정된 나는 아버지에게 ‘그 무거운 돌을 왜 지게에 담으셨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싱긋하게 웃으시면서 ‘그 돌이 우리가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지 않도록 잡아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된 지금에야 그 말을 이해할 듯합니다.

삶에서 우리 등에 무겁게 얹혀있는 짐같이 느껴지는 것들이 사실은 삶의 급류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균형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내게 냇가에 나가 방석 돌을 주워오도록 보내시곤 했습니다.

방석 돌은 반들반들하게 잘 닳은 넓적한 모양의 자연석인데 김치가 수북한 독 속에 올려서 그 무게로 배추의 숨을 죽여 맛있는 김치를 만듭니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자연석을 썼지만, 지금은 냇가의 자연석을 가져가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어서 곱돌로 누름돌을 만들어 팔고 있더군요. 그 시절에 나는 그 돌의 용도도 모르고 소똥방석 모양의 돌을 찾아 왔고, 어머니는 그 때마다 “울 아들 눈썰미도 좋아서 우째 이래 내 맘에 쏙 드는 돌로 찾아 왔노, 참말로 장하데이”하시며 칭찬해 주셨고 그 칭찬에 나는 나라를 구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습니다.

요즘은 내게도 저런 누름돌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돌발 상황에 과격하게 반응하는 감정과 성급한 성미가 버거워 그 성정(性情)을 지긋이 눌러줄 묵직한 마음의 균형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고 겪어야 할 일은 겪는 것이 삶이니 콸콸콸 움직이며 생동하는 활(活)의 여정에서 출몰하는 바윗돌을 감싸 안고 휘돌며, 매 순간 마음의 균형을 잡아 삶이 더한층 윤택하도록 저마다 마음속에 묵직한 누름돌 하나쯤 품고 있어야 할 시절입니다.

공기는 새가 날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지만, 공기 없는 곳에서 새는 날지 못한다.
무게는 새가 날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지만, 무게 없는 새는 애당초 날지 못한다.
새가 날 수 있는 바탕은 공기와 무게이다. 삶에서도 장애물이 그 삶을 지탱하는 바탕이다.
-존 맥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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