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대한산업안전협회장

 

가을은 넉넉함을 상징하는 풍요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낭만 가득한 문화의 계절이라는 점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각종 문화공연과 지역특색을 반영한 다양한 축제들이 줄을 이으면서, 전국을 문화의 열풍 속에 빠져들게 한다.

필자도 최근 경북 봉화의 대표적인 축제인 ‘청량사 산사음악회’를 찾아 가을밤의 매력을 한껏 느껴본 적이 있었다. 화려한 조명과 산세를 타고 흐르는 음악소리에 공연자와 관람객 모두가 하나가 됐다. ‘청산에 별 하나 띄어놓고’라는 음악회의 주제처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음악이 주는 감동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높은 수준의 공연과는 달리, 안전 측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급조된 무대시설과 함께 관람석에 대한 준비가 미흡하여 많은 사람들이 급경사지 및 철제계단, 심지어 주변의 장독대 위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떨어짐 등의 위험이 있음에도 안전지지대와 안전난간대 등 안전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도 많았다. 화장실 등 기본적인 편의시설이 크게 부족했던 점도 문제였다.

음악회가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도 아찔한 경험을 하게 됐다. 오색찬란한 화려한 조명이 있던 공연장과 다르게 산을 내려오는 길은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명이 미흡하면서 관람객들 모두가 핸드폰라이트로 길을 비추면서 주변을 일일이 확인하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길가의 장독대도 파손되어 주위에 파편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음악회의 완성도와는 다르게 안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수만명의 사람들이 몰리는 대형 음악회였다면 어땠을까. 큰 사고가 발생했더라도 절대 이상치 않았을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일수록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그 피해는 상상도 못할 만큼 커질 수 있다. 다행히 이날 음악회는 큰 사고 없이 잘 마무리 됐지만, 그동안 우리는 각종 문화공연과 축제를 통해 떠올리기 싫은 아픔을 여러 번 겪은 바 있다. 체계적인 안전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예전부터 지금까지 대형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해 온 것이다.

2005년 10월 17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경북 상주시민운동장 가요콘서트 압사사고, 2009년 2월 88명의 사상자가 났던 화왕산 억새 태우기 행사 화재사고 등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에 기억되는 사고로는 판교 환풍구 사고를 꼽을 수 있다. 2014년 10월 판교테크노밸리 야외광장에서 공연이 진행되던 중 환풍구 철제 덮개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환풍구 위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시민들이 18.5m 아래의 시멘트 바닥으로 추락, 16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처럼 여유롭고 즐거움으로 가득차야 할 문화공간이 한 순간에 혼란과 혼돈의 공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우리는 꾸준히 목격해왔다. 더욱이 공연장과 축제장을 찾았던 사람들 중에서는 필자처럼 사고가 나지 않았을 뿐 위험한 상황을 직접 겪어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연장과 축제장에서 사고가 꾸준히 발생하고 위험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보다 제도적인 허점을 논할 수 있다. 공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공연법’에 안전관련 사항이 정해져 있지만, 여기에서 공연은 “연간 90일 이상 또는 계속하여 30일 이상 공연에 제공할 목적으로 설치하여 운영하는 시설”로 한정되어 있다. 야외에서 이뤄지는 단기간의 문화공연 또는 축제들은 법의 적용을 받지 않은 채 지자체의 재량에 따라 안전이 관리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허점 속에 짧은 시간 안에 급하게 설치·해체되는 무대시설과 미흡한 안전시설, 그리고 안전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현장스탭, 관람객들의 미흡한 안전의식 등 많은 문제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공연장과 축제장은 지금까지 대표적인 안전사각지대로 여겨져 왔다.

안전이 담보될 때만이 품격 높은 공연과 축제가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문화강국임을 자처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러한 인식이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를 개선하는데 정부를 비롯한 모두가 적극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나가야 할 때다.

무엇보다 앞의 제도적 문제점에 대한 보완책이 하루빨리 마련되어야 하며, 각종 공연과 축제에 대한 정부 및 지자체의 단속 및 점검도 강화되어야 한다. 행사 주최자들은 철저한 안전진단과 안전점검을 통해 현장의 위험요소를 사전에 철저히 제거하고 현장스탭 등에 대한 안전교육에도 만전을 기해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만이 공연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관람객들이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충분한 관람석과 편의시설, 각종 안전시설을 갖춰놓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공연장 및 축제장을 찾는 관람객들의 안전의식이다. 질서와 안전수칙을 준수하고 현장 안전요원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하며, 위험요소 발견 시에는 안전요원에게 즉시 알리는 등 안전실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람 후 정리정돈과 청소 등 기본적 에티켓도 필수다. 관람객들에게는 공연을 즐길 권리도 있지만, 안전에 대한 책임도 함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올해 4월, 영국 BBC방송 라디오에서 한류열풍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한국, 조용한 문화강국(South Korea : The Silent Cultural Super Power)’이었다. 과거 경제적 고난을 극복한 진취성과 역동성, 그리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창의적인 국민정서가 한류의 특색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평가였다.

진정한 문화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콘텐츠의 독창성과 다양성 보다 성숙한 안전문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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