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효 대림산업 안전보건팀 차장

 

가장 이상적인 승리는 ‘부전이승(不戰而勝)’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전쟁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인류의 역사에 그 '부전승(不戰勝)' 기록들이 있습니다.

칭기즈칸(1162~1227)은 바람처럼 빠른 5만 기병을 이끌고 대항하는 적국의 어린아이, 어른, 가축은 물론 그 나라의 풀과 나무까지 깡그리 살육했습니다. 그것은 몽골에 대항하면 모두 죽는다는 공포심으로 적이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하는 전술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술은 불필요한 전쟁과 살육을 줄이려는 전략에서 나왔습니다.

몽골군은 유럽의 호레즘(Khorezm) 제국과의 전쟁에서 헤라트를 함락시킨 후 그곳에서만 120만 시민을 학살했고 그것은 병사 한 명이 평균 24명을 살육(殺戮)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인구가 4억에 불과하던 그 시대에 그렇게 4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을 살상했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군대였습니다.

그들을 진두지휘했던 칭기즈칸이 가졌던 큰 장점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는 것과 후세에 대한 교육열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교육열로 최고의 체계적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 쿠빌라이였고, 그는 칸에 등극하여 몽골과 대치하고 있던 남송(南宋)을 정벌하는 아주 특이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남송의 관문 격인 두 도시 양양과 번성까지 출진한 몽골군 10만은 두 도시 둘레로 깊은 수로를 파고, 파낸 흙으로 성을 쌓아 두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완성된 환성(環城) 길이가 100km를 넘었고,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된 포위 상태가 길어지자 긴장과 불안에 지친 남송 진영에서 탈주하는 병사들이 속출했습니다.
몽골군은 그들을 그대로 수용했고, 남송이 먼저 공격해오면 마지못해 대응하는 시늉만 할 뿐 본격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심지어는 성에 기근이 들자 군량미를 넣어 주기까지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몽골군 주둔지 인근에 각종 가게들과 장터가 들어서 거대한 무역장이 생성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전쟁의 상업화가 일어났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렇게 그 시대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

칭기즈칸의 보호 아래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쿠빌라이는 인문, 사회, 역사, 자연... 전반에 대한 통찰력을 깨우쳤고, 할아버지가 이룬 거대한 영토를 영속(永續)할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화적 기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전쟁의 목적은 남송의 중화문화를 온전하게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용맹뿐이었던 몽골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있던 남송의 명장 '여문환'은 쿠빌라이 칸의 고립 작전에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처자식을 모두 성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몽골군 10만이 공성을 시작하면 순식간에 성이 함락될 것을 알았으나, 성안의 모든 군사가 전사할 때까지 싸워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혀 본국을 도우려는 옥쇄(玉碎)를 결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치가 길어지자 본국에서 여문환을 중상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남송 최고의 장군이 가축이나 키우던 몽골군 따위를 퇴치하지 못하고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인가? 저 자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고, 여문환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조국이란 무엇인가?'
몽골군과 7년째 대치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변변한 원조도 없으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자신을 음해하는 조국에 대한 원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몽골 군사들은 쿠빌라이 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고, 그동안 몽골에 투항한 많은 남송인들도 그 능력에 따라 차별 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여문환은 군사들과 함께 몽골에 투항하고 맙니다. 항복한 여문환은 또 한 번 감격합니다.
자신이 옥쇄를 다짐하며 성 밖으로 쫓아냈던 처자식들을 쿠빌라이 칸이 거두어 극진하게 보살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몽골은 여문환과 두 도시의 모든 백성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전쟁은 없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그렇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문환은 쿠빌라이의 선봉부대 사령관이 되었고, 그 소문은 바람같이 퍼져나갔습니다.
몽골군이 남송의 수도로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하자 각 도시가 앞 다투어 투항해왔고, 그것은 전쟁이 아닌 거대한 융합이었습니다.

1279년 3월 남송의 중앙군 13만이 몽골군과 맞선 최후의 전투가 있었고, 남송의 중앙군 대다수가 몽골에 투항하면서 남송은 사라졌습니다.
남송은 그렇게 쿠빌라이 칸의 몽골에 흡수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원(元)의 태조가 되었습니다.
몽골의 용맹에 남송의 문화를 더하여 건국했던 원제국은 그 후 360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그것은 용맹한 무력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이었고, 몽골에 정통 중국의 문화가 더해져서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모든 시대에 적이 있고 라이벌과 경쟁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나간 역사에서 그 모든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대하고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성장을 위한 전략과 전술은 잠시 보류하고, 생존을 위한 관리에 매진해야 할 시기가 우리 앞에 도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위기와 기회의 격동을 넘어갈 방편 또한 '용맹(勇猛)과 인문(人文)'의 균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배가 고파도 우리가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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