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지금은 세계를 보는 눈이 더 이상 서구 담론의 전유물일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근대주의 이성 담론만으로도 부족하고, 소위 갖가지 포스트 담론으로도 세계를 해석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세계는 여전히 이성과 국가 그리고 자본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들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난다.

이성과 진보라는 낙관론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참담하게 무너져 가고 있고, 세계는 온갖 정체성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모습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하루하루 일상이 근대성이 해석하거나 그것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을 목도하는 것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민주노총이 부르짖는 계급주의는 아무런 울림이 없고,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라고 일갈한 예수가 설파했다는 그 진리는 요즘 같이 다원화 된 사회와는 잘 어울리지가 않는다. 원칙과 단정을 강조하다보니 자꾸 갈등을 야기 시킨다.

단일한 눈에 비친 세계는 ‘눈 먼 자들의 도시’일 뿐이다. 붓다의 세계관이 떠오른 건 이 대목에서 시의적절 하다. 붓다가 산 기원전 6세기 인도 동북부 사회와 내가 사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은 매우 유사하다. 기원전 6세기 인도 동북부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목도한 붓다를 다시 21세기 처참한 한국 사회 속에서 볼 수 있을까?

붓다가 갖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존재’가 아닐까? 붓다는 세상 만물은 실존하지 않는 것, 밤낮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 했다. 그것은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어떤 의식도 아니다.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단순한 느낌을 통해 잠깐의 시간 속에서만 가능할 뿐, 그것은 곧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붓다의 생각이다.

붓다는 모든 존재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그래서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로 생긴 것이고 그래서 그 안에는 본질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변화로 가득 찬 유한한 존재인 색(色 형태)이 되는 것이다. 형태란 속이 비어 있고, 실체가 없으며, 본질이 아닌 것이다. 색(色 물질), 수(受 접촉 감각), 상(想 지각), 행(行 의지), 식(識 의식)이라는 다섯 덩어리(五蘊)가 서로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거품, 신기루, 허깨비 등과 같은 것들이다. 여러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일 뿐, 그것 자체가 어떤 본질을 갖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모두 이러한 고(苦)의 존재들로만 가득 차 있다. 다른 그 어떠한 것도 생기지 않는다. 붓다는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일부 브라만 사상가들이 생각한 존재의 개념과 그를 바탕으로 하는 고의 세계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붓다가 생각하는 우리가 사는 세계 만물의 존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떤 본질에 대한 닮음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영적 본질이 닮음을 통해 이 세상에 현현한다. 단순히 그려진 모습이 아닌 영적 상사(相似)의 결과물이다. 자연은 하나의 실체로 구성되어 스스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을 의미하고, 사물은 그 안에서의 특정한 존재이다. 따라서 그 닮음의 결과물은 엄염한 실체이자 현실이다. 그 실체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이 신의 모습을 닮아 만들어진 인간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디지털 시대 요즘 이해하는 이미지는 붓다가 본 세계관과 가깝다.

본질적 실체를 전혀 갖지 못하고, 끝없이 복제 변화하는 외적이고 기계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비본질적 존재다. 그것은 연기(緣起)라는 거대한 억조창생의 윤회 시스템에 의해 생겨나 우리가 사는 이 감각적 세계 위에 강제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그냥 허탄한 감각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허탄한 본질 없는 세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물질과 감각 그리고 의례에 함몰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수 있도록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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