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우리가 보는 세계는 끝도 없이 변화하는 환상일 뿐’ 그 안에 영원한 본질은 없다라는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찾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사회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무지하여 어리석고 암울하며 게으르고 탐욕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 단계를 넘어서는 용기와 의지로 진보의 길을 걸으면 결국 진리를 달성하는 최종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보이지 않는 진리를 향해 사색과 통찰을 하고 그에 대해 찬양해야 한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현자라는 것이다. 고대 힌두의 베단따 철학이 말하는 불이(不二)론적 세계관이다.

반면 서구에서 발달한 근대의 실존주의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르트르는 이원론을 편다. 인간은 삶의 실존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에게 인간이란 ‘아무런 이유 없이 홀로’인 존재이고,  따라서 그의 존재론은 철저히 개인주의다.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선험적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설파한 것 또한 인간은 선험적으로 결정된 어떤 본질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그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생성이 존재이고, 이 생성의 기본 조건이 바로 외부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은 철저한 근대적 이성인이다.

전자의 세계는 매일 매일의 일상을 덧없는 것으로, 고통스러운 물질의 세계는 통찰과 깨달음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반면 후자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매일의 삶은 정치, 사회, 경제 등 역사의 여러 부문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 역사적 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개입하여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의례적인 반면 후자는 내용적이다. 전자의 삶은 관습적이고 집단적인 반면 후자는 개혁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래서 전자의 삶은 흔히 말하는 좋은 전통을 잘 보존하고 가꿔야 하는 보수적인 태도이고 후자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진보적 태도이다.

2016년이 지나갔다. 2016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단순히 숫자의 나열일 뿐, 실질적으로는 자기 주체성을 전혀 갖지 못하는 전통의 일부분일 뿐이다. 2016년 12월 31일이 끝나고 2017년 1월 1일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상은 없다. 직장이 있는 사람은 직장으로, 직장이 없는 사람은 공원이나 낚시터로, 알바하는 청년은 알바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새해가 밝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달라지고 싶으면 자신이 처하는 위치에서 삶의 조건을 바꿔야 한다. 2016년 마지막 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소망을 빈다고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굳이 전통의 한 부분을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다. 비록 숫자의 놀음에 지나지 않지만 새해가 되면 새롭게 뭔가를 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잡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새해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해왔던 일, 다시 실패함으로써 자존감에 상처만 주고 우울 모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을 결심해서 자신을 패배자로 만드는 일에 함몰될 필요는 없다.

내 스스로가 패배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찾는 게 시급하다. 그것이 사회 구조와 연계되는 일인지 아닌지를 찾는 게 필요하다. 모든 문제를 내 탓, 나의 노력 부족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근대 사회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회 구조와 나 자신의 관계에서의 상호 연계성을 찾아보고 거기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2016년이나 2017년이나, 연말이나 연시나 여름 한 가운데에서나 항상 우리가 늦추지 않고 견지해야 할 삶의 인문학적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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