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늦가을부터 반년이 넘도록 주말마다 서울의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의 주요 도심에서는 백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대통령 탄핵을 외쳤다.

그리고 그들의 소망대로 대통령 탄핵은 이루어졌다. 이제 정국은 곧바로 대통령 선거로 들어간다. 가을과 겨울을 관통하면서 촛불은 국민 다수의 통합을 이루어냈고, 마치 촛불이 그러하듯이 빛을 발한 뒤 묵묵히 꺼져가고 있는 것 같다.

2016년 촛불집회는 한국의 정치사 혹은 사회사에서 중요한 화두를 하나 던져주었다. 소통과 비폭력. 소통은 전통적 사회에서는 대척점에 있는 사이 즉 남녀, 노소, 사제와 신자, 권력자와 국민 등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상적인 관계는 깨지고 그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터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그 물리적 충돌이 폭력이 아닌 비폭력으로 일어났다. 비폭력은 저항의 주체가 이루고자 하는 결과가 아니고 그 목표를 이루고자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소통의 한 방식이며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무엇인가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목표를 이루었다. 소통이 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가 비폭력이라는 소통으로 해결된 것이다.

특히 나이 어린 중고등학생들도 참여하고, 가족 단위로도 참여하고, 각자의 이념과 정치 지향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시민이 참여한 열렬한 촛불 집회는 20여 년 전 과거 대학생이나 노동자들이 독점적으로 전유했던 이데올로기 정치의 독점적 권력을 순식간에 같이 나누어 가지는 현상도 보여주고 있다. 과거 광장에서는 그곳에서만 통용되는 구호만 난무했는데, 이제는 생활 속에서 배어나오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그것도 일률적이지도 않고, 일사분란하지 않은 채, 소위 지방 방송의 목소리가 중앙 방송보다 더 크게 나올 정도의 그야말로 난장이 한바탕 펼쳐진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큰 목소리가 나오면, 곳곳에서 억압받고 무시당하는 여러 작은 목소리들이 잇달아 터져 나온다. 한국 사회가 건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표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도 하나 있다. 너무나도 강한 촛불집회로 인하여 우리가 보듬어야 할 진보적 의제들이 모조리 파묻혀버렸다는 사실이다. 비록 촛불집회 난장 안에서 여러 진보적 의제들이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시간 알바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학교를 다니고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소위 알바 청년들의 목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다.

천막으로, 굴뚝으로, 망루로...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들이 작게는 수십 일에서부터 많게는 수천 일까지 목숨을 걸고 사투하고 있다. 크게 바라는 바도 없다. 인간답게 살고 싶고, 일하고 싶다는 것이다. 해고는 죽음이니 해고를 시키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들이 다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탄핵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그런 목소리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라는 더욱 큰 블랙홀에 그런 목소리들은 다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새 대통령이 뽑혀도 마찬가지다. 집권 초기 소위 적폐 청산을 하는데, 검찰, 언론, 국정원 등을 손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일 권력은 없다. 그렇다면 그 목소리에 언제 귀를 기울일 것인가?

정의는 큰 것만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고, 큰 일 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대한 악과 불의에 저항하고 그것을 단호하게 뿌리 뽑는 것도 정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아주 작은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중요한 정의의 요체다. 힘이 필요한 자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일보다 더 하찮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고 새 대통령이 들어서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어느 누군가의 삶이 갈수록 적어지는 사회, 그런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고 그 안에서 평화와 사람이 사는 세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그런 세상으로 가자는데 대하여 당신은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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