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어떤 삶이 옳고 어떤 삶이 그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은 이런 삶을 존중하고, 이렇게 살고자 한다, 정도라고나 할까. 누구의 삶이 화려하고, 누가 유명하고, 존경을 받는 그 삶이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처한 환경이 있고, 그 환경에 따라, 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극복한 삶도 의미가 있지만, 굳이 극복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살아온 삶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런 삶도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저런 삶도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삶 전체를 놓고 봐도 그렇다. 물 흐르듯, 바위를 만나면 굽어 가기도 하고, 경사가 있는 곳에서는 쏜살같이 달리기도 하지만, 너른 들판에 와서는 가는 듯 안 가는 듯 하기도 한다.

초지가 반드시 일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것도 있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다. 그 어떤 삶도 가치 없는 것은 없다. 피라고 이름 붙여 뽑아버리는 것은 벼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에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이지, 그 피가 본질적으로 벼에 대해 필요가 없는 존재는 아니잖은가. 모든 이의 삶이 다 그렇다. 사회와 불화한 삶, 가정과 불화한 삶, 자본과 불화한 삶, 모든 불화의 삶도 그에게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 가치가 있는 모든 생각과 삶 그것을 듣고, 말하고,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런 세상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세상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가장 우선적인 것이라면 어떤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자신이 보는 세계관에 따라 판단하고, 규정하는 태도를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하나 생각해 보자.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나를 남자라 규정하면 내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이 적은 양이든 많은 양이든, 여성성이 다 빠져 버린다. 여성성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다 빠져 나가버린다. 나를 교수라 규정하면 또 다른 것이 빠져버릴 수 있다. 아비라 부르는 것도 부분일 뿐이고, 진보 운동가라 부르는 것도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게 어떤 대표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익숙하게 다가오는 타성이기도 하고 전통이기도 한다. 그러한 것들이 규정하는 그 일부분은 전체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까다로움을 취하고자 한다. 타성과 전통의 틀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성의 삶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 같이 복합적이고 이질적이고 중층적인 여러 정체성들이 드러나면서 충돌할 때는 삶이 매우 필요하다.

서로 다른 여러 이질적인 것들이 이뤄내는 조화가 주는 추(醜)를 다른 시선으로 보면 미(美)가 될 수도 있다. 추가 없는 미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미라는 것은 추의 다른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 둘이 만나면 서로 색다른 긴장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영원히 진행되는 변증법이다. 그런 우주적 질서 속에 우리의 삶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이 또한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안에서 일관되고, 합리적이고, 안정된 것들로만 이루어진 삶은 없다. 무질서하고, 잘 안 어울리고, 비겁하고 숨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외롭고, 누가 볼까 두렵고 그런 것들로 삶이 구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이 아닐까? 온갖 것이 다 섞인 그 잡다한 세계, 그것이 곧 보통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야말로 우아하지도 못하고, 저질스러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 냄새 나는 세상과 더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삶이라는 것이 항상 아름답고, 우월하고, 승리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햇볕 가득 들어오는 따뜻한 봄날이 있으면 푹푹 찌는 여름날도 있고, 그 여름날이 있어야 또 시원한 가을날이 오지 않겠는가?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시간의 변화대로 사는 게 삶이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