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교 충북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겨우내 대통령 탄핵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더니, 봄이 되니 대선 소식의 한 쪽에서는 3년 전에 침몰했던 세월호의 인양 소식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자식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든, 아니면 부모를 놔두고 먼저 눈감아야 했던 자식의 입장에서든,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당분간 ‘4월은 잔인한 달’로 기억되기에 충분할 것 같다.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하여 쉽게 연상되는 해양사고가 있다. 영국의 훼리선이었던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Herald of Free Enterprise)호는 1987년 3월 6일 오후 7시 벨기에 지브뤼게(Zeebruges)항을 떠나 영국의 도버(Dover)항으로 향했으나, 출발하자마자 침몰한다.

문제는 활짝 열려 있던 램프도어였다. 당시 배에는 459명의 탑승객과 3대의 버스, 81대의 차량, 47대의 트럭이 실려 있었는데, 차를 다 실은 뒤 램프도어를 닫아야 했던 보조수부장은 4시간 전에 마신 술 때문에 졸려서 자러가느라 닫지 않았고, 1등 항해사는 갑판에서 문이 닫힌 걸 확인해야 했으나 담당도 아닌데다, ‘담당자가 했겠지 뭐…’ 라는 막연한 생각에 확인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경사진 항구에서 차량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는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넣어서 평소보다 1m 가량 더 잠긴 상태였으나 그 물을 빼지도 않고 출항했으며, 예정보다 일정이 늦은 상태여서 속도를 더 내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이동 중에 배 바닥부분의 유속이 빨라지고 압력이 낮아지면서 평상시보다 배가 더 깊게 잠기게 되어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물이 유입되어 배가 균형을 잃었다고 한다. 이런 천수효과는 얕은 곳일수록 잘 발생하는데 하필이면 그날 출항한 항구가 그런 곳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고가 난 곳은 항구에서 겨우 1500m 떨어지고, 깊이는 10m에 불과했지만, 엔터프라이즈호는 불과 2분 만에 뒤집혀 460여 명의 승객 중 200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이런 사고 사례를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는 미리미리 대비하여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1953년에 창경호가 침몰하여 30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1993년에는 서해 훼리호가 침몰하여 300여 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또 2014년에는 세월호가 침몰하여 3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사고가 반복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거듭되는 사고를 통해서도 아직 사고예방의 충분한 교훈과 그에 따른 해결책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때문인지, 신문에서는 예전과 달리, 우리 사회의 ‘안전문화’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되짚는 특집기사가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극히 실망할 만하다. 벌건 대낮에 스마트폰을 보며 6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시민, 스쿨존에서 규정의 두 배 속도로 달려가는 자동차, 터널 안에서 추월하는 승용차, 안전모를 쓰지 않고 작업하는 건설현장 등등.

이 모든 것을 쉽게 매스컴은 ‘부주의’나 ‘안전불감증’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그런 표현은 매스컴의 보도제목으로 매력적일지는 모르지만,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무엇, 무엇이 문제이니 그것을 이렇게 개선해 보자’는 사회적 캠페인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일상적 경험에서 보자면, 위험행동(또는 위반행위)을 감수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사결정은 단순히 위험성평가의 결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얻어지는 결과의 가치가 크다면 누구든 그 위험을 감수하려 달려들 것이다. 반대로, 위험을 회피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든가, 추가적인 비용이 든다거나, 가능한 한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의 경우에도 역시 소극적 선택의 결과로서 위험감수행동이 취해지기 쉽다.

리스크심리학에서는 앞의 것을 위험감수행동의 ‘효용’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위험회피행동의 ‘불효용’이라고 하는데, 이 두 가지는 사람들의 위험관련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이다. 위험감수행동의 ‘효용’은 작고, 위험회피행동의 ‘불효용’이 크다면 사람들은 굳이 위반행위나 불안전행동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TV의 어느 예능 프로에서 사회 한편의 임의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적인 위반행위를 촬영하여, 당시 상황의 모든 사람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올바르게 행동하면 경품을 주는 프로그램을 내보낸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 사회의 일상적 위반행위는 눈에 띄게 감소했다고 보도된 적이 있었다. 몇 초 빨리 가려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행위를 통해 잃는 것이 더 크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의례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TV프로가 없어지고 남들의 눈총이 없어지니, 슬그머니 다시 예전의 위반행위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통해, 위반과 위법 행위를 바라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 하나하나는 이 효용과 불효용을 구분 짓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평소에도 한다’, ‘다른 사람들도 한다’, ‘다른 사람 눈에 띄어도 질책당하는 일이 없다’는 인식하에 누구나 지긋이 눈감고 모른 척 하는 사회에서는 불안전행동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위반에 대해서도 심리적 제동기능이 작동하지 않지만, 반대로 주변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따가운 시선은 위반행위, 불안전행동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요컨대, 사소한 불안전행동, 불안전요인을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는 시민의식이 우리 사회에 충만하다면, 사고는 예방될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일찍이 공자님은, 자신의 실수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자신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반복되는 사고를 통해서도 나아지는 게 없다면, 우리 사회의 학습능력은 지진아 수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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