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인간은 선과 악을 함께 가진 존재지만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는 악이 선을 압도한다. 인간은 꿈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그 꿈은 곧 사회 속에서는 야망이 되고 그래서 집념이 끊이지 않으며 그 집념은 결국 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회에서 그들은 처음에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고 하지만 자유는 결국 권력의 지배로 이어지고 그 권력의 지배를 지속시키기 위해 그 자유를 억압하는 자들이 썼던 그 방식을 똑같이 사용한다.

세상은 갈등이 충만한 곳이다. 갈등이란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무한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누구든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싸우지 않고 서로 돕고 화합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볼 때 그 런 세상은 단 한 번도 일 분 일 초도 있어 본 적 은 없다. 그렇다고 그런 세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사람’이라는 말은 ‘살아 있음’이라는 말이라고 난 믿는다. 살아 있음이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싸움이란 없어지지 않는 것이고, 그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갈수록 지능화 되며 갈수록 복잡해지는 것이다.

정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싸움을 허용 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정치란 갈등의 조정과 중재라는 것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 조정과 중재의 범위는 매우 넓다. 굴복이나 복종 이 한 쪽 끝이라면 무력 충돌이 또 다른 끝이다. 그 사이에서 정치는 수도 없이 많은 수법들 이 조합되면서 자기 번식을 한다. 속고 속이고, 뺏고 뺏기는 사이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한 도 끝도 없이 커진다. 정치는 그 권력의 무한복제 속성 속에서 사람들이 세계를 파괴하지 않고 그나마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만들어가는 수단이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현장으로 변할 것이다. 정당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개인끼리 충돌 하여 세상이 약육강식의 살육 전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부엌에 있는 가스레인지의 안전밸브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고안된 것이 정당이다. 결국 정당이란 각각에 따라 목표도 다르고, 이해관계도 다르고, 조정과 중재를 하는 방식도 다르다. 같은 것이 있다 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 합법적 싸움의 채널이 정당 정치다. 물론 그 테두리 밖의 일을 하면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때 처벌을 받고 목적을 달성하느냐 법을 지키기 위해 목적을 버리느냐는 그 개인과 그가 속한 정당이 결정할 문제다. 불법과 처벌까지도 정치의 한 방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정당 안에서 얼마나 복잡한 술수가 계발되겠는가?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는 그 어떤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이익과 목표를 위해서라면 법이 허용되는 범주 내에서 상대를 속여야 하고, 상대는 속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누가 도덕적이고 누가 민주적인지를 쉽게 따져 물을 수 없다. 정치를 냉정한 현실의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은 독하고, 현실이 독하니 정치도 독하다. 독하니 속하고 더럽다. 더러우니 바르고 정의로우며 도덕적인 것으로 치장되는 법이다. 때로는 종교적 신념같이 보여 지고 때로는 성스러운 영역까지 갖게 된다. 이런 부분에서 정치는 그 속성이 전혀 다름에도 예술과 닮아 있다. 예술은 사회적 금기를 위반으로 맞설 때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는데 그 때 그 작품은 성(聖)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한다. 그런데 예술은 반(反)대중이지만 정치는 친(親)대중이다. 정치는 창조의 영역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현실의 영역이다. 정치의 본질을 모르고 뛰어들어 열광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종교와 같이 되고, 그때 세상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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