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정치 전성시대다. 전 국민이 정치 평론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정치가 과잉 소비되고 있다.

정치를 통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정치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지도 않을 터인데도 사람들은 정치를 바꾸기에 온 몸과 마음을 다 한다.

그 열과 성의 장이  SNS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토론을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모르는 체 지나가버리면 된다. 반드시 진실만을 말할 필요도 없다. 자기 혼자의 생각이 전혀 비논리적일지라도 어엿한 한 의견으로서 대접을 받는다.

그러니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힘들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다 규정되고, 재단되고 판단된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사실상 별로 중요하지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규정하고 재단하는 홍수가 되어 버린 세상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 곧 죽기 직전인데, 그 독화살을 뽑아내기 전에 그 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출신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 화살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느 방향에서 왔는지, 그 독은 무슨 독인지 등에 대해서 묻고 조사하고 토론만 한다면 그 사람은 이내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알 수 없는 것은 그냥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그 논쟁은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켜 흥미롭고,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당면한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 담론을 위한 담론은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하고, 오로지 그것을 즐기는 자들에게 재미와 위안을 줄 뿐이다.

붓다는 분명한 확증을 줄 수 없는 형이상학에 몰두하는 것을 집착이라 했고, 그 집착은 자기만의 편견을 낳고, 그것은 결국 과오로 가게 되어 있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알 수 없는 것, 확증할 수 없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달리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귀담아 듣고,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성찰하면서 마음 속 평안을 얻고 그것을 상대방과 함께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예술의 세계에 잘 들어맞는다. 예술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거나 다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알 수 있는 것만 말하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르고서 그냥 느낌이나 감성으로 즐기면 될 뿐이다. 함부로 규정하고 그것으로 재단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예술을 통해 뭔가를 읽어내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객관적 사실과 관련된 것만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보는/읽는 사람의 느낌이다.

그 느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느낌이 마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규정의 근거가 되는 듯 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그림과 사진을 보는 데서 달라진다. 그림 같은 경우에서는 특정 시기와 문화 속에서 널리 동의되는 인습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느낌을 평할 수 있다. 시선이 어디에서 흘러들어와 어디로 빠져나간다거나, 빛이 어디에서 들어옴으로써 이미지가 어떤 느낌을 자아낸다거나, 색채를 어떻게 맞춤으로써 전체의 분위기를 어떻게 조성하는가 하는 따위의 평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에서 그런 평을 해서는 안 된다.

우연히 그러한 것이 이루어질 수는 있으나 그 우연성을 가지고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어서 그렇다. 분위기가 어떻다느니, 느낌이 어떻다느니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그것이 은연중에 시대적 인습으로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커진다. 특히 그 사람이 권력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은 그의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어떤 권력이 갖는 느낌이 마치 객관적이고 어떤 판단의 기준이 되는 듯 존중하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 주체성이 없어서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주체성이 서지 않으면 자기는 사라지고 남의 복제품만 유령같이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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