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지금은 세계를 보는 눈이 더 이상 서구 담론의 전유물일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근대주의 이성 담론만으로도 부족하고, 소위 갖가지 포스트 담론으로도 세계를 해석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세계는 여전히 이성과 국가 그리고 자본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들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난다. 이성과 진보라는 낙관론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참담하게 무너져 가고 있고, 세계는 온갖 정체성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모습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하루하루 일상이 근대성으로 해석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것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하면 과언일까?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며 노동계가 부르짖는 계급주의는 아무런 울림이 없고,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라고 일갈한 예수가 설파했다는 그 진리라고 하는 것에 귀 막은 자가 너무나 많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의 세계는 자기들만 눈 먼 자들의 도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변하지 않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모든 존재에 본질은 없고 수시로 바뀌는 현상만 있을 뿐이라면 우리는 과연 실존적으로 살 수가 없다는 말인가? 그 철학적 사유가 닿는 곳은 사람들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으나 적어도 사회적으로 보면 어떤 보편성에 대한 변함없는 관계는 많이 사라진 듯하다. 인류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렇지 않을 때가 어디 있었겠는가마는, 세상이 말세가 아닌 때가 어디 있었겠는가마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인간의 얼굴을 상실한 그 정도는 너무 심한 것이 사실이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어머니의 사랑도 이젠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우정도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고, 사랑이란 유행가 가사에서마저도 인기 없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그런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지극히 어려워진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 것도 따르지 말고 자신이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되어 그 뭔가를 통찰하는 것이 필요할 때다. 돈이나 권력을 숭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남의 눈이나 집단이 함께 하는 어떤 의례나 문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지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인간 상실의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그러한 것을 결과적으로 찾았는지, 이루어냈는지의 여부보다는 그러한 자세로서 매일을 돌아보는 성찰의 삶을 영위하며 산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의미 있는 실존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루어지는 결과로서의 삶이 아닌, 찾아가는 혹은 그 어딘가를 향해 바라보고 찾아가려고 애쓰는 자세가 의미 있는 실존이라고 본다.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다 보니 인간은 그 기술에 얽매이게 된다. 그러면서 이전 시기의 근대성이 추구하던 절대와 진보의 근대적 결합이 흔들리게 되고, 의심받게 된다. 이제는 가치와 의미를 분멸하는 것은 소멸하고 오로지 새로움만이 지고지선이며 참의 자리를 차지한다. 즉자적인 사회, 감각적 사회, 미래와 이상은 가고 남은 것은 오로지 지금 여기밖에 없는 사회가 왔다. 이 시대에는 문화가 기호를 생성하는 집단성 즉 종교나 이데올로기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현존이 아니고 이제는 역으로 기호가 그러한 집단성의 문화를 생성한다. 그 문화는 감각, 분위기, 코드 등이 구성하는 소비의 역학으로 설명되는데, 그 어느 문화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어느 것도 본질적인 것은 없다. 심지어는 자연조차도 마찬가지다. 과거 문화와 상징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의 자연도 이제는 몇 번이고 반복되면서 유통된 자연의 기호가 소비된 것일 뿐이다.

대립도 없고, 집단도 없고, 인간도 자연도 사라져버리는 세계. 그렇지만 그 모든 변화가 하나의 방향으로 간다. 그것은 모든 것은 변화하지만, 상품으로 소비된다는 사실이 굳혀져 가는 방향이다. 소비로부터 자유로운 것 그것이 성찰이고, 그것이 이 시대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향일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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