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밤 9시 29분경 대구 달서구 진천동 신라병원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 3층에서 시작된 불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상황은 긴박했다. 화마가 병원 내부를 집어삼키고 있을 때, 병원엔 입원 환자 35명과 근무자 11명 등 총 46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중환자는 15명, 경증 환자는 20명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많아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망자나 중상자도 없었다.

기적이었다. 

이번 사고는 여러 면에서 지난해 12월 21일 발생한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와, 지난달 26일 발생한 밀양 세종병원 화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 사고 건물은 모두 5~9층, 연면적 1500~4000㎡의 중형 건물이었지만 사망자 숫자는 밀양 39명, 제천 29명, 대구 0명으로 큰 차이가 났다.

비슷한 조건에서 발생한 화재인데 어떻게 피해규모가 이처럼 확연히 다를 수 있을까. 생과 사를 가른 것은 다름 아닌 ‘기본의 철저한 준수’여부였다. 

현장 관계자와 소방당국에 따르면 신라병원 당직실에서 화재를 처음 목격한 모 간호사는 연기를 보자마자 119에 즉각 신고했다. ‘최초 발견자가 곧바로 119에 신고한다’는 매뉴얼에 따른 조치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했던 이유는 평소 반복 실시했던 재난대응훈련 덕분이었다.

신라병원 측에서는 주기적으로 의료진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고 발생 시에 대비한 환자 대피 방법, 소방기기 사용법, 화재 신고 등을 교육해왔다.

이로 인해 화재 발생 당시 간호사의 침착하면서도 신속한 신고가 자연스레 나올 수 있었고, 그 결과 소방대가 골든타임을 확보해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화재 진압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반면, 밀양 세종병원과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사고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먼저 밀양 세종병원 직원들은 신고에 앞서 자체 진압을 시도하다가 골든타임을 놓쳤다. 병원 1층과 3층에서 총 9대의 소화기가 사용된 흔적이 있다는 소방당국의 조사가 이를 뒷받침한다. 
제천 스포츠센터도 마찬가지다. 당시 센터 건물 관계자들이 소화기로 화재를 진압하면서, 20여분이 흘러 신고 골든타임을 놓친 것으로 알려졌다.

직원들의 대피 유도와 소방대 협조방식도 피해규모를 가른 결정적 이유가 됐다.

신라병원 직원들은 출동한 소방관들에게 2·3층에는 사람이 없으니 4·5층 환자를 구해야한다고 안내했고, 이를 들은 소방관들은 발화층인 2층 방화문을 폐쇄해 연기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 연기 차단과 동시에 직원들 및 소방관들은 신속히 환자들의 대피안내에 나섰다. 

하지만 밀양 세종병원에서는 대피 안내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는 화재 시엔 이용해서는 안 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했다.

제천 스포츠센터는 더 심각했다. 화재로 인한 사망자 29명 중 20명이 2층 여자사우나에서 발생했는데, 가장 큰 이유가 대피로로 이동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성 사우나 자동문은 전기가 끊겨 열리지 않았고 대피로를 안내한 직원도 없었다. 이로 인해 20명이 밀실에 갇혀 참혹하게 숨졌다.

이처럼 신라병원 화재사고는 밀양 세종병원 및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사고와 여러모로 대비돼 안전관계자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소 비상 대응 매뉴얼을 숙지하고 반복적인 재난대응훈련을 한다면 사고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비상 상황에서 생사를 가르는 것은 매뉴얼의 준수 여부다. 기본을 따르면 위험 속에서 살 수 있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