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진 을지대학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오한진 을지대학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다. 화를 내는 것보다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 관계로 갈등을 겪거나 직장 생활, 돈 문제, 불경기, 취업난, 실직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 등 여러 외적 요인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억울함과 분함, 증오 등의 감정을 쉽게 풀어내지 못해 생기는 병이 화병이다. 외부 자극이나 변화에 대한 감정이 억눌리고 쌓여서 한국인 특유의 화병으로 발병하게 되고 이는 주로 인간관계에 문제가 된다.

건강보험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심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및 적응장애’인 화병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의 수는 2011~2013년 3년 간 연평균 11만5000명이었다. 주로 40대와 50대 중년 여성층에서 두드러졌는데 여성 환자 수는 평균 7만 명으로 남성 환자 수의 1.5배를 넘을 만큼 많았다.

불합리한 상황이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생존본능이지만 화병은 스트레스가 오랜 시간 지나치게 억압되면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렇게 억압된 감정은 부적절한 상황에서 어느 순간 느닷없이 폭발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그냥 넘길 수만은 없다. 따라서 감정을 속으로 삭이기만 하는 것보다 적절하게 표현해야 병이 안 생긴다.
 

화병에서 분노조절장애까지
화병은 풀리지 않고 쌓여 울체된 화(火), 불의 성질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뜻이다. 화병의 증상을 보면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을 내고, 분노를 쉽게 드러내며, 무시당한 느낌과 배신감, 복수심 등 공격적인 성향이 강해진다.

가슴이 조이듯 답답하거나 숨이 막히고, 얼굴과 머리에서 열이 느껴지며,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밖에도 불안과 초조함으로 불면증, 우울감, 식욕 감퇴, 소화불량, 몸이 건조해지면서 자주 목이 마르다거나 만성 피부질환인 건선 등 다양한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심하게는 만성적인 분노로 인한 고혈압이나 중풍 등의 심혈관계질환의 발병 혹은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마음의 상처를 꾹꾹 눌러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신체적인 증상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 때문에 불안을 느끼면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화병을 다스리려면 화가 나는 일순간의 감정대로 행동하지 말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자기 통제력이 필요하다. 감정에 휩싸여 내뱉은 말과 행동은 금세 후회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억누르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오랫동안 화가 쌓이면 잠재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분노충동조절장애’로 문제가 심각해진다. 지난 2015년 4월 발표된 대한정신건강의학회 조사 결과 한국인의 50%가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으며, 10% 정도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감정을 조절해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병의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오랫동안 쌓인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막말, 욕을 퍼붓는 식으로 무작정 화를 내거나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마다 분노조절 방법이 다른 만큼 화를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누구든 화가 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즉시 화를 내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소리를 지르다가 점차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반면 무조건 참는 것 또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화가 폭발할 때는 그 상황을 멈추는 게 중요하다. 심호흡을 하거나 스트레칭 등으로 마음의 안정을 취해 분노의 감정을 먼저 가라앉혀야 한다.

화는 표현하면 할수록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등 스스로 질문하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화라는 감정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다짜고짜 수시로 화를 내면 건강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화라는 감정 사이에 거리를 두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입장만이 아닌 상대방의 사정도 배려하면서 감정 자체에 빠져들지 않도록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화가 난 근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알아야 화를 풀 수 있다.

평소 매일 10분씩 생각을 비우는 명상을 하거나 취미활동 등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에너지가 바닥나지 않도록 마음을 돌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면 가족의 도움을 받거나 그렇게 해도 풀기 쉽지 않은 경우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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