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 교수의 산업안전보건법 해설

정진우 교수(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산업안전보건관리에서 각 주체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은 안전보건관리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준수되어야 할 기본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재해예방 선진국의 경우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를 수급인의 안전보건조치와 구분하지 않은 채 불명확하게 안전보건조치를 법적으로 강제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도급인에 대한 불명확한 역할과 책임 설정은 외양적으로만 도급인에게 많은 의무를 부과하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킬 뿐, 수급인 근로자의 안전보건에 대한 도급인의 실제적인 이행은 담보하지 못하는 결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전부 개정법 시행령 제11조(도급인이 지배·관리하는 장소)는 산업안전보건법 제10조 제2항의 ‘도급인의 사업장’에 대한 확장개념인 “도급인이 제공하거나 지정한 경우로서 도급인이 지배·관리하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장소” 중 ‘장소’(토사·구축물·인공구조물 등이 붕괴될 우려가 있는 장소, 기계·기구 등이 넘어지거나 무너질 우려가 있는 장소, 안전난간의 설치가 필요한 장소 등 22개 장소)에 대해서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고 ‘제공하거나 지정한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지배·관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도급인이 ‘제공하거나 지정한 경우’에서 ‘지정’이라는 표현과 ‘지배·관리’라는 표현 모두 추상적이고 모호할 뿐만 아니라 적용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준을 법령에서 제시하지 않으면 건전한 상식과 통상의 판단능력을 가진 도급인조차도 어느 장소에 대해 안전보건조치를 하여야 하는지를 예측·판단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해당하는 중요한 내용, 그것도 위반 시 무거운 형사처벌이 수반되는 사항에 대해 법령에서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규정하는 것은 헌법원칙인 죄형법정주의가 요구하는 형벌법규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기준을 시행령이 아닌 행정지침으로 정하게 된다면, 이는 구체적인 기준을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모법의 위임범위를 벗어난 것일 뿐만 아니라 행정기관의 자의적인 법해석·집행으로 이어질 위험이 매우 크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직까지 이 부분에 대해 지침조차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설마 22개 장소에 해당되면 무조건 지배·관리하는 장소라고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마저 든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런 도급인이 제공하거나 지정하기만 하면 22개 장소는 모두 도급인의 사업장에 해당하게 된다. 당연히 명확성의 원칙에 명백히 위배된다.

‘도급인의 사업장’에 대한 확장된 개념의 ‘지배·관리하는’이라는 표현은 당초 전부 개정 산업안전보건법 입법예고안에는 없었던 것인데 당초 규정의 지나친 불명확성 때문에 국회 심사과정에서 추가된 규정이다. 그런데 행정부가 그 입법취지를 무시하고 사실상 ‘지배·관리하는’ 한정적 수식어를 제거하고 도급인의 사업장을 자의적으로 무한정 확대해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이는 수범자인 도급인에게 예상 가능한 행동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도급인의 사업장에 대한 확장된 개념으로서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작 처벌하기도 어려울 것이다(물론 항변할 지식과 돈이 없는 중소기업들은 처벌되겠지만). 그리고 산업안전보건법 역시 그 준수가 목적이 되어야지 처벌이 목적인 양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법집행기관인 행정기관이 생명처럼 여겨야 하는 것은 예측가능성이다. 헌법원칙으로 명확성의 원칙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헌법은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법이다. 헌법을 한낱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면 법치주의는 무너지게 된다. 진정 하청근로자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행정기관도 법치주의를 존중하여야 한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 원리이자 법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다. 도급인에게 하청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예방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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