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 說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당시 정부는 위기 극복의 방안 중 하나로 산업안전 규제 완화를 택했다. ‘기업활동 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동일 산업단지 내 안전관리자의 공동채용을 허용하고 안전관리자 의무고용인원을 하향 조정했다. 이외에도 유해작업 도급 시의 안전·보건평가를 중단하고, 프레스·리프트에 대한 정기검사를 면제해 주는 등 산업현장의 각종 안전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줬다.

당시는 수십 년간 이어진 성장일변도의 기조 속에서 어렵사리 안전문화의 싹이 트던 상황이었는데, 특조법은 그 싹마저 뽑아내고 말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산업재해율은 1998년 0.68%, 1999년 0.74%, 2000년 0.73%, 2001년 0.77%, 2002년  0.77%, 2003년 0.90%로 무섭게 치솟았고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여 년간 매년 2000명이 훌쩍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졌다. 또 우리나라는 OECD가입국임에도 산재왕국이라는 오명을 얻게 됐고, 산업재해로 인한 직간접적인 경제적 손실도 18조 원에 달했다.

결국 안전 규제 완화가 경제 회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없이, ‘경제 살리기’란 명목 하에 노동자만 위험에 내몰았던 것이다.

이 아픈 기억이 최근 되살아나고 있다. 요즘말로 마치 데자뷰를 보는 것 같다. 코로나19로 촉발된 경제 위기 상황을 맞아 경영자 단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산업안전보건 규제를 완화하라고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고 있고, 정부는 고삐를 쥔 손의 힘을 조금씩 빼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지난달 23일 안전 규제 완화 등의 요구 사항을 담은 ‘경제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를 국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축소해달라는 것이 골자로 알려졌다.

또 정부는 어려움에 빠진 기업들을 돕고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이유로 정기적으로 실시해야할 산업안전 감독을 유예하고 안전교육의 연기를 허용해주고 있다. 정부의 관리에 힘이 빠지자 현장 안전관리의 기본이자 기초라 할 수 있는 보호구 수급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9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자동차는 국내에 마스크 생산 설비를 직접 구축해 계열사 전 임직원들에게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오죽하면 현대차가 저럴까 싶다.

안전 규제 완화가 국민 모두의 건강 보호를 우선하고 경제난 속 생존이 다급한 사업주를 지원키 위한 긴급조치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하지만, 향후 촉발될 결과가 심히 우려스럽다. 한번 느슨해진 안전의식 수준은 다시 끌어올리기가 매우 어렵다. 특조법 이후 1998년(0.68%)과 비슷한 수준의 재해율로 돌아온 것은 2010년(0.69%)이었다. 원상 복귀하는데 무려 12년이나 걸린 것이다.

아울러 최근 일련의 조치로 사업주와 현장이 ‘안전’을 위기상황에서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할 카드로 여길까봐 걱정도 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할 때부터 국민안전을 국정 운영의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고 거듭 천명했다. 그런데 지금 안전을 위해 또 다른 안전을 내려놓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서둘러 바로잡지 않으면 산업현장에 지금은 안전관리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1997년 IMF때와 비교하면 우리 산업현장의 안전관리 수준이 꽤 높아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주요 선진국 대비 우수한 수준은 아니다. 정확히는 이제야 선진국으로 도약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닦인 정도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숱한 고비가 있었고 많은 이의 희생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공든 탑이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 상황 속에 흔들리고 있다. 

비록 지금 질병과의 싸움에 힘겹겠지만, 그 여파가 경제의 근간인 산업현장의 안전까지 흔들지 않도록 정부가 조금 더 세심히 챙겨주었으면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에는 타협이 없으며 항상 안전은 최우선의 가치라는 것을 위기 속에서 더욱 확실히 보여주었으면 한다.

산업현장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 속 위생관리에 신경을 쓰는 만큼 안전관리에도 절대 빈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안전과 보건은 하나임을 잊지 말자.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