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 說

후두부, 좌측 쇄골(빗장뼈), 좌·우측 늑골(갈비뼈), 우측 척골(아래팔 뼈), 좌측 견갑골, 우측 대퇴골(넓적다리 뼈) 등 전신 골절 그리고 강한 외력에 의한 췌장 절단. 덤프트럭에 치여 숨진 어느 교통사고 사망자의 얘기가 아니다. 아동학대로 세상을 떠난, 고작 16개월 된 여아, 정인이의 몸 상태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는 정인이 입양 부모의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아동학대치사) 등 혐의에 대한 첫 공판기일이 열렸다. 이번 사건이 앞서 한 방송사의 보도로 재조명된 이후 국민적 공분과 관심이 컸던 만큼 이날 재판이 열리는 법원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분노에 찬 시민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입양모 A씨의 혐의가 아동학대 치사가 아닌 살인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검찰은 재판 당일 기존의 아동학대치사 혐의가 아닌 살인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재판에 앞서 사안의 엄중함 등을 고려해 전문 부검의 3명에게 정인이 사건 재감정을 요청했으며,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의 자문도 받았다. 대부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전해졌다.

앞으로 입양 부모에게 어떤 혐의가 적용될지는 재판부의 손에 달려 있다. 살인 혐의가 인정될 경우 형량은 대폭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양형기준에 살인죄는 기본 양형이 10~16년이다. 여기서 추가적인 요소가 부여되면 무기 이상의 중형도 선고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입양 부모에게 살인죄 혐의가 적용되면 제2의, 제3의 정인이가 나오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아동학대가 근절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은 국민들의 분노뿐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아동학대 의심사례 건수는 총 14만5364건으로 집계됐다. 연도별로는 ▲2015년 1만6651건 ▲2016년 2만5878건 ▲2017년 3만923건 ▲2018년 3만3532건 ▲2019년 3만8380건 등으로 매년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추세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아동학대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주된 배경에는 아동을 위한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안전망의 부재가 지목된다. 일반적으로 아동학대범죄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의 조사가 이어진다. 그런데 훈육이라는 이유 등 아동학대행위자의 저항 때문에 철저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의 장기화로 신고 의무를 가진 어린이집 등 전문기관의 감시에서 벗어나 독립된 공간인 집에 머무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요즘 더욱 걱정스럽다.

지난해 우리나라 출생자 수는 27만5815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부에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많은 대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어린 아이들이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안전망이 마련돼 있지 못하다면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최근 일터의 안전을 대폭 강화한 중대재해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국민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각종 법안들도 속속 시행되고 있다. 경제뿐만 아닌 사회 전반의 모든 역량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일터뿐만 아니라 우리주변의 안전 사각지대를 발굴.개선하고 보다 촘촘한 안전망을 갖춰나갈 때 비로소 우리가 염원하는 선진국으로 당당히 도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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