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학배 씨

경북 경산에 소재한 경산시장애인종합복지관. 최근 이곳에선 ‘산재근로자 사회적응프로그램’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 산재근로자들의 재취업을 돕고, 원만한 사회 복귀를 지원하기 위한 문화체험, 직업체험, 체육활동의 등의 강좌가 개설 돼 높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복지관 곳곳에서 많은 산재근로자들이 산재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유독 시선을 집중시키는 이가 하나 있다. 바로 도학배(63세)씨다. 그는 탁구 등 스포츠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탁구장 전체를 울리는 기합소리와 휠체어를 무색케 만드는 빠른 몸놀림으로 어느새 복지관의 유명인사가 됐다. 산재의 어두운 그늘을 벗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거푸집 전도사고 입어
1990년 9월 늦여름의 기세가 한창인 날이었다. 도학배씨는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모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형틀 목수로 일을 하고 있었다. 건설현장에서 목수로만 10여년을 일한 그였다. 기술도 좋았지만 매사 꼼꼼한 일처리와 빈틈없는 조심성으로 현장에서 평판이 좋았다.

사고가 난 그날 그는 거푸집 조립을 하고 있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거푸집 조립 시 사고의 위험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받침목을 세워가며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러던 중 그는 부족한 자재를 보충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자재를 가지고 작업현장에 돌아왔을 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이 세워둔 거푸집 받침목이 없어졌다. 그의 작업이 끝난 줄 알고 누군가 빼간 것이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의 눈에 반대편에서 동료들이 받침목을 세우기 위해 거푸집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안돼’라는 외침이 나오기도 전에 거푸집이 그를 향해 넘어졌다.

“아내의 헌신 덕에 용기 얻어”
다급한 비명소리에 동료들이 달려와 그를 구조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오른발에는 감각이 없었다. 당황한 동료들과 현장 관리자들은 응급조치를 펼칠 생각도 못하고, 그를 장비가 널부러져 있는 승합차에 태워 병원으로 이송했다. 덜컹거리는 차속에서 그는 왼발의 감각마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척추 골절로 인한 하반신 마비. 의사는 그에게 수술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충격과 실의 속에 병원에서 반년을 보냈다. 의사의 장담처럼 차도는 없었다.

큰 딸이 초등학교 5학년, 작은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막중한데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라니.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온통 자살 등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채워져 갔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헌신적인 아내의 사랑을 저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사고를 입은 직후부터 연탄배달 일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2400여장의 연탄을 배달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식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해달라며 그에게 늘 당부를 했다.

“나는 건강한 사람”
가족을 위해 용기를 내 살아보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 그에게 선배 산재근로자들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들은 운전을 하는 방법과 근로복지공단의 재활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이후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주변의 도움 덕에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듯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틈틈이 장애인들의 이동을 도와주는 자동차 봉사 등 각종 사회봉사활동에 나섰으며, 경산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하는 재활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현재 그는 자신을 가리켜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과 정신만은 다치기 전보다 더 깨끗하고 건강해졌다는 것이다. 그의 향후 계획은 자신 보다 더욱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다. 그가 나눠줄 ‘희망’이라는 선물이 우리사회 곳곳에 퍼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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