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근로자가 말하는 안전, 김경준씨

1960년대 후반. 군대를 갓 제대한 김경준씨는 강원도에 위치한 대한석탄공사의 한 광업소에 운전직 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당시 그의 노모는 운전이 위험한 일이라며 간곡히 만류에 했었다. 하지만 가진 기술이라고는 운전밖에 없었기에 그는 노모의 걱정을 뒤로 하고 입사를 단행했다.

그는 군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했기에 운전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또 당시만 해도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는 사람 자체가 귀했던 터라 운전직 사원은 대접이 후한 편이었다. 노모의 걱정이 마음에 남긴 했으나 그는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성실히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10여년이 흐른 1980년 7월의 어느날 아침.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사고가 일어났다.

 

빗길에 교통사고 나
1980년 7월 29일 아침. 지겨운 여름 장마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빗줄기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출근용 차량의 운전을 맡은 김경준씨는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오는 날은 운전을 하기가 다소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동료 직원 두 명을 태우고 서둘러 출근길에 나섰다.

출발한지 20분여를 지났을 무렵이었다. 빗길에 갑자기 차가 미끄러졌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차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때 그의 눈에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가 보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그의 차량과 마주오던 차가 충돌했고, 곧 그의 차는 튕겨져 길 한가운데 전도됐다. 그는 허리 부근에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지는 가운데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 돼
인근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척추골절로 인한 하반신 마비는 차도가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서울 한양대학교 병원으로 옮겨가 2차 수술을 받았다. 역시 차도는 없었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한 채 살아야만 하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것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는 물론 자식만 셋이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절망과 비관이 교차하는 가운데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치료는 종결되었으나 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치료를 종결하자 요로결석 등 또 다른 질병까지 찾아왔고, 몸 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다. 결국 인천산재병원(구 인천중앙병원)에 재입원을 했다.

1년여가 지난 다음 다시 퇴원을 했으나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인해 치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로 인해 그는 집인 대구에서 인천산재병원까지 15년간 통원 치료를 받았다.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들 도와
그가 긴 투병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다친 직후부터 하숙생을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또 자식들은 아버지의 부상에도 흔들림 없이 학업에 매진해 3명 모두 정규 대학을 나왔다.

아버지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며 열심히 살아가는 가족들 앞에 그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통증을 참아가며 다시 운전을 배우고 낚시, 탁구 등의 레저활동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지만 뼈를 깎는 노력이 더해지자 목표로 했던 것들이 하나 둘 가능해져 갔다.

현재 김경준씨는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장애인들에게 운전을 비롯해 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가르쳐주고 있다. 또 장애인들의 발이 되어주는 자동차 봉사활동에도 활발히 나서고 있다.

불편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을 도와주기위해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가 보여주고 있는 사랑과 삶에 대한 의지는 앞으로도 많은 산재근로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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