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씨

1950년대 후반, 문성근(54세)씨는 전남 보성의 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끼니를 때우기도 버겁던 시절이었기에, 그는 어려서부터 생활 전선에 나서야만 했다.

논일, 밭일, 공장의 허드렛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자 광주광역시에 있는 직업훈련소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장일을 배웠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청운의 부뿐 꿈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낯선 땅이었지만 그는 타고난 성실함과 밝은 성격 덕분에 어느 건설현장에서건 환영을 받았다. 이런 칭찬에 보답키 위해 그는 더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는 사랑하는 여인과 가정을 꾸렸고, 아들도 하나 얻었다. 그에게 있어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이 단꿈은 두 번의 대형사고로 위기를 맞았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통사고를 딛고 일어나

1992년 5월 30일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의 피해는 컸다. 왼쪽 안면부 함몰, 왼쪽 눈 실명, 치아 파손 등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수술만도 수년에 걸쳐 4번이 이어졌다.

힘겨운 날들이었지만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뒤엔 자신이 지켜야할 소중한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참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수술과 치료과정을 견뎌냈다.

그렇게 병마를 이겨내고 그는 일어섰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기에 남은 가족들 역시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아내는 내조에 충실했으며, 아들은 흔들림 없이 공부에 매진하여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를 했다. 가족간의 애틋한 사랑이 예전의 단란함을 다시 찾아오게 만든 것이다.

또 다시 덮친 대형사고

힘겹게 되찾은 행복은 채 10년을 못 채웠다. 지난해 12월 경기 파주의 다세대주택 신축 건설현장 옥상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 추락하는 사고를 입은 것이다. 영세건설업자가 공사비를 아끼겠다고 사다리의 지지대를 허술하게 고정해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사다리에 발을 얹는 순간 사다리가 뒤쪽으로 쭉 밀렸고, 내 몸은 공중에 떠 있다가 쓰러져 있는 사다리 위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사고 직후 인근 대형병원으로 이송돼 긴급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사태를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그만큼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흉추 11, 12번이 골절된 것. 이는 결국 하반신마비로 이어졌고, 그는 더 이상 두발로 걸을 수 없게 됐다.

병원에선 더 이상의 수술적 치료는 의미가 없다며, 재활치료를 권했다. 이에 그는 재활치료전문병원인 근로복지공단 안산산재병원으로 옮겼다.

안전지킴이로 거듭날 것

주변 사람들은 일반인들은 평생 한번 겪기도 힘든 대형사고를 두 번이나 겪은 그를 걱정스런 시선으로 봤다. 이제는 정말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란 우려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우려를 무색케 했다. 그는 그저 얼굴 한 가득 미소를 띄우고, 재활치료에 매진했다.

그의 이런 노력에 안산산재병원의 의료진은 감동을 했고 1대1 맞춤 재활치료, 심리재활치료 등 그를 위한 재활프로그램을 운영, 치료에 만전을 기했다.

문성근씨는 내년 중으로 퇴원을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해야하는 불편한 몸이지만 동료 근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작업시 주의사항과 안전의 중요성 등을 전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그는 “사고 후 정말 힘들었지만 묵묵히 병간호를 해주는 아내와 열심히 공부를 하는 아들을 생각해 힘을 냈다”면서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 그는 “하반신을 못 쓴다는 생각보다는 그래도 상반신과 두 팔을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졌다”라며 “누구든지 긍정적인 자세를 갖고,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굳은 각오를 되새기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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