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천씨

지난 9월 30일 서울 aT센터. 이곳에선 세계 57개국의 장애인 국가대표 기능인 445명이 참가한 가운데 ‘2011 제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치열한 경합의 현장에 산재근로자 임금천씨(인천산재병원 특수재활교실 소속)도 있었다. 그가 참여한 종목은 목공예. 주어진 과제는 5시간안에 기러기 모양의 수저를 만드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이 혼연의 힘을 다하는 가운데 정해진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임금천씨를 비롯한 각 나라의 대표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신의 제품을 제출했다.

그리고 이어진 결과 발표. ‘임금천’이라는 이름이 금메달 수상자로 호명됐다. 산재의 고통을 넘어 세계 최고의 목공예 장인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지게차 운전 중 사고입어

임금천씨가 사고를 당한 때는 지난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인천에 위치한 모 합판코팅업체에 다니고 있었다. 원래는 건설현장에서 포크레인 기사로 일을 했었으나 업종 특성상 일감이 꾸준히 들어오지 않다보니, 잠시 파트타임으로 해당 업체에서 지게차 운전수로 일을 한 것이다.

수년간 건설현장에서 여러 중장비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에게 지게차 운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관련 자격증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보다 작업량이 조금 많아지자 일에 욕심을 냈다. 기존에 싣던 양보다 더욱 많은 합판을 지게차에 실은 것.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심히 운전을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합판을 선반에 쌓아올리려는 순간 합판이 그를 향해 쏟아져 내린 것이다. 헤드가드는 순식간에 짓뭉게졌고, 그는 합판과 운전석 사이에 협착됐다.

동료들에 의해 인근의 모 대형병원으로 후송, 긴급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척추골절로 인한 하반신마비환자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 한 살이었다.

고통의 나날 속에 목공예를 접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둔 젊은 가장이 한순간에 하반신마비환자가 됐다. 엄청난 슬픔 속에 병원에서 2년여를 보냈다. 자살과 같은 안 좋은 생각도 수시로 들었지만 가족을 생각해 간신히 참아냈다.

살기로 결심을 했으니 일단 무엇이든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특수재활교실이 있는 인천산재병원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TV 등을 고치는 기계공과에 들어갔다. 재미를 막 붙일 쯤 병원의 교과목 조정에 따라 기계공과가 없어졌다. 할 수 없이 시계공과로 적을 옮겼으나 이마저도 사양산업에 접어들면서 폐지됐다. 연이은 교과목 폐지에 좌절감이 컸다. 특히 시계공과의 경우 전국대회에서 은메달까지 땄던 터라 아쉬움이 더했다. 그래서일까. 잠시 방황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때 그를 잡아준 것이 목공예실의 윤봉기 교사였다.

윤 교사는 집중력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있는 그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라면 목공예에서도 충분히 실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다. 윤 교사의 믿음은 옳았다.

임금천씨는 목공예를 빠르게 익혀나갔다. 배운지 채 4년도 되지 않아 전국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더니 재작년에 열린 국가대표 평가전에서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어진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 참가해 영예의 금메달을 수상했다. 절망의 나날을 헤매던 산재근로자가 세계 최고 목공예 기능인의 반열에 우뚝 선 것이다.

이제는 남을 돕는 사람이 될 것

휠체어를 탄 채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꿈꿔왔던 국제대회 석권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그에게는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겨났다.

목공예가로서 자신만의 공방을 열고, 그곳에서 다른 산재근로자들의 재활을 돕는 것이 바로 그것. 산재 이후 늘 ‘도움을 받는 사람’이었던 그가 이제는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임금천씨는 “산재를 입고 술이나 도박 등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라며 “이들이 가정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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