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적막 속에 (中夜萬籟寂)
그 누가 청아하게 거문고를 타는가? (何人弄淸琴)
버스럭대는 뜰 앞의 낙엽 소리 (摵摵庭前葉)
갈바람이 숲속에 불어오누나 (西風吹古林)
숨어 사는 이는 반도 못 듣고 (幽人聽未半)
쓸쓸히 앉아서 옷깃을 여미네 (愀然坐整襟)
가을이라 귀뚜라미는 절로 울지만 (寒蟲秋自語)
불평한 심정을 어찌 다하랴 (豈盡不平音)
밝고 밝은 하늘의 달도 (皎皎天上月)
내 마음은 비추지 않네 (照人不照心)

변종운(卞鍾運 1790~1866) 〈한밤중에 거문고 소리를 듣고[中夜聞琴]〉《소재집(歗齋集)》 (한국문집총간 303집)


모두가 잠든 고요한 가을밤에 홀로 잠 못 들며 시름에 잠겼는데, 어디선가 아련히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쏴하고 숲을 흔들면, 낙엽이 떨어져 정처 없이 구르고, 그 속에 흐르는 거문고의 청아한 음률은 애처로워 차마 더 들을 수 없다. 눈물을 애써 참으며 옷깃을 여민다.

가을이라 구슬피 우는 귀뚜라미도 어떻게 나를 달래줄 수 있으랴. 하늘에 밝게 떠서 천지를 비추는 달조차 이 마음을 몰라주는데...

이 시는 조선 후기에 역관(譯官)으로 활동했던 변종운의 시이다. 조선 시대에 중인(中人)의 신분으로 문집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뛰어난 글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적인 한계 때문에 능력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글에는 울분이나 한이 서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시 역시 쓸쓸한 가을의 정서를 표현하면서, 마지막 구절에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세상에 대한 울적한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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