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씨

 


1980년 전남 목포 출신의 시골 청년은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푼 꿈을 안고 상경했다. 그의 눈에 비친 서울은 휘황찬란했다. 순식간에 그에게 부귀와 영예를 듬뿍 안겨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청년은 얼마 되지 않아 차가운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배움이 부족하고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서울은 그리고 세상은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열심히만 살면 자신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중국집 배달일, 식당 그릇닦이, 주방보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혹사’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열심히 살았지만 청년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청년은 제대로 된 직장을 얻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구로 1공단에 있는 한 공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희망을 꿈꿨지만,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엄지만 남은 손이었다. 산재노동자협의회의 일원인 한영철(49세)씨의 이야기다.

프레스 오작동에 절단사고 입어

1983년 한영철씨는 서울 구로 1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에 소재한 모 카스테레오 케이스 제작업체에 입사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프레스로 케이스를 찍어내는 일이었다.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틈틈이 선배들에게 배워가며 스스로를 숙달시켜나갔다.

일에 적응이 될 무렵 기계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페달을 한 번 밟으면 한 번 작동해야할 프레스가 가끔씩 반복 작동을 했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고쳐달라고 할 처지도 또 그럴 여유도 없었기에 조용히 돌아섰다.

그렇게 4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는 주변 공장에서도 알아주는 ‘성실한 일꾼’이 됐다. 한 달 평균 잔업 시간만 180시간에 달할 정도로 일에 매진한 결과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자신이 노력할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삶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추석을 앞둔 9월 초순, 그는 여느 날처럼 홀로 남아 잔업을 하고 있었다. 한창 일에 몰두하고 있을 쯤 갑자기 프레스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기계에서 손을 빼는 타이밍에 프레스가 반복 작동을 했다. 순식간에 왼손의 검지, 중지, 약지가 잘려나갔다.

연이은 재해에 엄지만 남아

생각보다 수술은 빠르고 간단했다. 너무나 쉽게 장애인이 된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슬픈 감정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것이 그의 삶이었다.

상처가 아물기 무섭게 일터로 향했다. 그리고 전처럼 4~5시간의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동안 일만 했다. 숨 돌릴 틈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는 이때 한 가지 일을 더 삶에 추가했다. 바로 가난한 학생이나 가정을 후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힘든 삶 속에 남을 돕는 것이 버겁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보람을 얻을 수 있었기에 그는 행복했다. 이런 선행이 복을 불러온 것일까? 그 뒤 그에게 좋은 일이 연이어 생겼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회사에서도 반장으로 승진을 했다.

하지만 이처럼 힘겹게 되찾은 행복은 채 5년을 가지 못했다. 1992년 4월 그는 또 다시 프레스에 양손이 찍히는 사고를 입었다. 프레스의 안전센서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산재를 넘어 희망을 쏘다

청춘을 모두 바친 회사를 나왔다. 엄지밖에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그곳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2년여간 삶을 비관해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에겐 자신이 지켜야할 가족이 있었다.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겠다 싶은 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지 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인연을 맺었던 산재노동자협의회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다른 산재근로자를 돕는 일을 한다면 자식들에게 조금 더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1995년 협의회의 문을 두드렸다.

한영철씨는 현재 협의회에서 각종 노동단체의 홍보지를 포장하거나 DM발송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 틈틈이 인근 병원의 산재근로자들을 찾아 애로사항 등을 듣고 상담도 해주고 있다.

그의 향후 목표는 어려운 가정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학생들을 다시 후원해 주는 것이다. 지금은 생활고 때문에 잠시 후원을 중단하고 있지만, 열심히 노력해 재개할 것이라고 그는 다짐한다.

산재의 고통을 넘어 이제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앞으로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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