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이불 썰렁하고 불등도 캄캄한데 (紙被生寒佛燈暗)
어린 중은 밤새도록 종도 치지 않는다 (沙彌一夜不鳴鍾)
새벽부터 일찍 문 연다 성내겠지만 (應嗔宿客開門早)
암자 앞 눈 쌓인 소나무를 봐야겠네 (要看庵前雪壓松)

이제현(李齊賢 1287~1367)〈산사의 눈오는 밤[山中雪夜]〉《익재난고(益齋亂藁)》

이 시에서 저자는 ‘눈이 펑펑 오는 날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종이솜을 넣은 얇은 이불은 썰렁하니 온기가 없고 불등도 어둑어둑한데 사미승은 추위에 일어나기 싫어서인지 밤새 종 한번 치지 않는다.

새벽이 되자 방문을 나서며 다시 사미승의 눈치를 본다. 잠 없는 손이 괜스레 댓바람부터 문을 열어 찬바람 들이치게 한다고 성내지나 않을까. 하지만 그가 짜증을 내든 말든 절 앞에 있는 눈 쌓인 소나무의 장관을 구경해야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시에서 정작 설경의 장관은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미승의 눈치 때문에 설경을 구경하지 못한 소심한 마음 한 자락만 펼쳐놓았다. 하지만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저자는 설경에 대해 아무런 묘사도 하지 않았지만 시를 읽는 독자에게는 어느새 산사의 설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방문을 열자마자 달빛보다 더 환한 눈빛에 눈이 부시고 매서운 바람은 코끝을 스치며 밤사이 내린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이곳은 희노애락의 어떤 감정도 스며들지 못하는 순백의 세계이다.

음력을 기준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작은 절에 한번 가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서 해묵은 감정의 찌꺼기를 놓고 오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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