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大기획

“산업발전이 빛이었다면 산업안전은 그림자였다.
빛과 그림자 50년 역사속에는 기막힌 사연들이…”

역사(歷史)는 강물처럼 흐른다. 그렇게 도도히 흐르면서 진화한다. 우리 대한민국 역사도 그처럼 때로는 조용하기도 했지만 질풍노도의 성난 파도처럼 간혹은 심산유곡 높은 계곡의 폭포수 같은 소리를 내면서 전진해왔다.

50년이란 매우 뜻 깊은 반백년의 세월, 대한민국은 경제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를 체험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들이 그 속에 쓰러져 갔던가? 수학여행 학생들을 태운 열차가 전복되고 거대 선박이 바다에 침몰하고 와우아파트가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쓰러지고 대구도시가스가 폭발하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고 대연각호텔이 불에 타는 등등의 아프고 시린 역사는 끊임이 없었다.

그렇게 구비구비 흘러내려온 절망과 탄식의 강물이었지만 사단법인 대한산업안전협회(KISA)는 그 우여곡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국가의 재산과 국민의 생명들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고 조금이라도 덜 희생시키려는 정신을 지닌 보이지 않는 공기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야말로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논리의 비약일까? 물과 공기는 함께 어우러져 공존하지 않으면 자연 생태계 파손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생각에서 그런 비유를 해 본 것이다. 따라서 흐르는 강물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만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느 영역에서든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소중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대한산업안전협회란 조직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우리의 산업발전이 있었을까? 언제나 열차의 양쪽 바퀴처럼 또한 비상하는 새의 양 날개처럼 그런 동반의 개념으로 성장해온 우리 대한민국 산업발전, 산업안전 50년의 역사! 그 세월 속에는 때로는 소리 없는 빛으로 때론 부패부위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 그 소임을 다 해온 ‘대한산업안전협회’라는 단체가 있었음을 아는 국민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본지는 대한민국 산업의 발전과 안전, 그 대장정의 빛과 그림자의 구석구석을 추적, 격주간으로 이 지상기행을 시작하면서 독자들의 애독과 지도편달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산업태동기

1960년대 초, 당시만 해도 우리 산업계는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본의 아니게 수많은 산재 사고가 발생했다. 어떻게 하든지 이를 예방하고 개선해 가면서 사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사단법인 대한산업안전협회(KISA)은 맨처음 ‘대한산업안전본부’라는 이름을 달고 보건사회부로부터 허가(제666호), 1964년 7월6일자로 탄생하게 된다.

초대 김연준 회장으로부터 현24대 신진규 회장에 이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과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이제는 상당한 능력과 경력을 갖춘 안전전문기관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였음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지금은 고용노동부를 비롯해 안전행정부와 국토교통부, 교육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많은 정부기관 및 기타 여러 산업체와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각종 안전에 따른 업무협약 체결을 하고 또한 인증을 받은 안전기구 단체로서 최선의 활약을 다 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부족한 인력이며 재원 문제 등으로 본의 아니게 가끔은 옥의 티처럼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로 어려움을 겪는 일도 없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우리 산업발전과 안전의 진척사(史)는 당연히 이 나라 경제부흥의 한 축이 되겠기에 필자는 서두에서 산업발전과 산업안전을 강물과 공기로 비유했지만 한편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의 운명과 모든 국력을 걸고 추진한 한국산업의 발전사가 어둠에 한줄기 빛이었다면 그 뒤에는 그림자와도 같이 우리 경제성장의 빛과 그림자로 동반자가 되어온 대한산업안전협회의 ‘안전업적’의 숨은 내조 역할이 상당했었음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 할 것이다.

긴 세월 역사의 무덤 속에 잠들어있는 역사스토리를 새롭게 발굴하여 쓰는 이글은 내년에 편찬될《KISA 50년사》의 큰 줄거리가 될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KISA 50年史 속에는 1945년 광복이후부터 20년간의 과거사 스토리 등 전체내용의 20% 정도는 추가, 보완할 것이며 각종 통계와 사건일지, 그리고 특별화보 등의 추가삽입 등은 별도로 준비 중에 있으며 본 특집기사에는 싣지 않음.)

 


참으로 숨 가쁘게 돌아간 대한민국 역사의 회전목마! 그 바퀴에 깔려 쓰러져간 수많은 재산과 희생된 산업전사 생명들을 모두 다 지키고 보호하진 못했으나 단 한건의 산재사고라도 더 막아내고 단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철저한 안전의식을 가슴에 새기면서 때로는 퇴근도 못하고 밤을 새우고 때로는 식사도 건너뛰면서 묵묵히 땀 흘려온 ‘산업안전역군’들은 잘한 것은 별로 표시가 없고 잘못 한 것 만 질책과 원망을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조심하고 인내하며 겸손의 자세로 최선을 다해 직장과 사회, 나아가 우리산업의 안전을 지켜온 그들, 마치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무명용사들처럼 피땀 흘리며 일해 온 안전책무 관련자들의 노력과 공로의 업적을 정부와 국민들이 인정하고 아울러 이제 한번쯤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신뢰하고 우러러 볼 시점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지난 50년의 세월…. 흔히들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나 눈부신 경제발전 그리고 민족중흥도 모두가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힘들었지만 철저한 안전의 역사를 부등켜안고 성장해왔다. 혹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왜 정치역사 이야기며 박정희 시대 이야기가 많냐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개발독재자’라는 비난까지 받아가면서 18년이란 세월을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생의 마지막 날까지 건설현장 준공식(삽교천 방조제)에 참석하여 치사를 통해 “이제 우리는 가난에서 탈피하여 위대하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 나갈수 있게 되었다”고 대국민 연설을 하는 등,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일(건설, 생산, 수출등의 산업부흥)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이조 5백년 사초(史草) 중에 세종대왕 실록스토리가 가장 많이 등장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보면 된다.

또한 정치와 경제, 사회문제 그리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분노와 정의로운 투쟁활동의 발자취를 빼면 ‘산업역사실록 = 빛과 그림자’의 스토리가 무의미 할 수도 있고 스토리의 전개가 너무 단조로워 지겠기에 그렇다.

아무튼 대한민국 근대 발전사와 획기적인 산업혁명 태동은 박정희정부 시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으며 최근에도 문화일보 이신우 논설위원이 펴낸 ‘코리아노믹스’라는 책에서도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경제 성공했을까?’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 책 속에 보면 이런 글이 서술되어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서거했다. 그해의 수출액은 147억 달러이다. 5·16혁명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60년도 수출액이 3283만 달러였으니, 집권 기간 동안 무려 448배의 수출 증가를 이룩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박 대통령의 굳은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 후 30여년이 흘렀다. 1960년대~1970년대의 사건들은 역사 속에 파묻힌 일들로서 많은 부분이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를 경험 못한 새로운 세대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실정을 모르거나 착각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잣대로 그 때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현재까지도 현실로 살아남아,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큰 작용을 하고 있다.”

매우 의미있는 지적이며 이것이 바로 필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보편적 논리가 아닌가 싶다. 뒤 돌아보면 아득한 1960년대 초,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운 박정희 혁명정부(국가재건최고회의)는 넓은 바다를 끼고 있는 천혜의 고장, 고래잡이로 유명한 울산시 장생포항 인근 언덕바지에서 역사적인 국내 최대의 공업단지 조성 기공식을 거행한다.

 


1962년 2월 3일 그때 군복을 입은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여기 울산공업단지 조성은 혁명정부가 총력을 다 할 상징적 웅도(雄圖)이며 그 성패는 민족 빈부의 판가름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였고 3만여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박정희 의장은 그날의 치사를 통해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인 부귀(富貴)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생 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榮盛)을 재건하려는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실현 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민족 재흥(再興)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寶庫)를 마련하는 것이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역설했다.

이날의 치사(致辭)야 말로 우리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신호탄이었고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은 매우 적중한 예언이기도 하다. 왜냐면 지금 대한민국은 경제대국(G20)의 반열에 우뚝 올라섰기 때문이다.

이 무렵 어느 날 박정희 의장은 한국 원조기관인 유솜(USOM:미국의 대외원조기관, United State Operations Mission)처장 킬렌을 울산지역 공단준비 여행에 동행하도록 초청했다. 일행은 김용태(金龍泰) 당시 중앙정보부장 고문 등 군정요인 몇 사람과 이병철(李秉喆) 삼성 회장 등이었다. 이들은 헬기를 타고 울산에 내리자마자 지금의 공업단지를 끼고 있는 태화강변 쪽으로 향했다. 마침 눈이 내려 하얗게 뒤덮인 황량한 벌판에 군데군데 말뚝이 세워져 있었다.

박 의장은 먼저 킬렌에게 “우리는 여기에 종합제철공장과 비료공장, 그리고 정유공장 등 기간 산업체를 건설할 작정이요. 미국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좀 도와주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삼성 이병철을 향해 “이제부터 돈을 많이 번 기업인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할 일이 많소. 정부가 추진하는 조국의 근대화 작업에 여러분이 적극 협력해 주어야겠소”하고 전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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