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삼성·현대·포철은 한국경제 3大 견인차

「울산유공」준공은 우리 경제발전의 신호탄!

1964년 5월 7일,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울산정유공장(유공)은 드디어 준공을 하고 힘찬 시험가동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전기가 들어가지 못한 농·어촌이 상당히 많을 때였으므로 울산정유공장의 야경(夜景)은 그야말로 ‘신천지’를 방불케 하는 느낌이었고 눈이 부실정도로 휘황찬란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가난에 허덕이던 우리나라로서는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고 어떤 기적 같은 경제적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크고 작은 산업체에서는 안전보다는 경제자립과 수출을 목표로 생산증대에만 총력을 기울인 시대였으니 웬만한 안전사고(산재)쯤은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공장 자체 수습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과 비교하면 솔직히 안전무방비시대였으니 그 당시의 산재사고나 또는 산업안전 실적에 따른 세부적인 기록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안전무시’ 의식 속에 희생된 산업근로자는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노조의 활성화로 산재근로자들이 노조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던것도 사실이다.

어찌됐던 우리나라는 70년대 수출 100억불 달성이라는 매우 큰 성과를 내게 된다. 1964년 수출 1억불을 달성한 이래 불과 13년 만에 100배라는 기록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다.

후진공업국인 나라에서 단기간 내 수출 100억불 달성은 결코 쉬운게 아니다. 수많은 산업전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과감한 투자로 기업을 잘 운영하여 높은 실적을 쌓아올린 기업주들의 숨은 노력, 정부당국의 산업정책이 적절히 어울려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면에서 필자는 당시에 가장 큰 수출실적을 올린 3대기업(재벌그룹) 총수 3인의 이야기를 잠시 쓰겠다. 현대 정주영, 삼성 이병철, 포철 박태준 회장 등 지금은 모두 고인들이 된 전직 회장들이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국내는 물론 해외로 진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로, 혹은 열사의 사막을 향해 달렸다. 돈이 되는 것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인류의 재난을 부의 축적기회로 바꾼 이들은 흡사 돈에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을 뿐 아니라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통해 부가가치를 극대화함으로써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경제적 번영의 길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수천년 동안 상공업 천시 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인드를 자본주의 정신으로 전환시키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가난을 극복하고자 동분서주했던 이들 재벌창업자들은 우리나라 공업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몸소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 공업화에 있어 기획자이자 연기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수출 1억불을 시작으로 100억 불을 달성하게 된 1960~1970년대 대한산업안전협회의 업무활동사항을 요약해 보기로 하자.

우선 안전교육 사업은 다음과 같이 육성되어왔다. 1964년 본회 설립 후부터 안전관리자들에 대한 교육을 서울, 부산, 대전 등 대도시 3개 지역에서만 실시해왔다. 안전관리자는 안전관리규칙에 명시된 직무담당자로서, 당국이 지정한 안전관리자들을 대상으로 1년에 평균 300~600명가량 교육을 실시했다. 교육은 1일 6시간씩 1주일간 이루어졌다.

그리고 75년 10월 27일 안전관리자 직무훈련 대행기관으로 공식 지정 받아 77년까지 안전관리자 직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 노동청장이 직접 참여해 격려사를 하기도 했다. 그 후 1978~1980년에는 교육이 근로복지공사로 이관됨에 따라 실시되지 않았다고 기록돼있다.

74년에는 기계안전기사, 화공안전기사, 전기안전기사 등의 자격증 제도 도입에 맞춰 자격취득 교육을 실시(교육 전 과목 응시자는 20여 일간, 일부과목면제자는 1주일간 과정 운영)하였고, 1970년대 후반까지는 과학기술처와 함께 안전기술자격시험의 원서 교부처로 지정받았다.

산업안전 진단의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큰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낀다. 68년 7월 노동청(現 고용노동부)의 요청으로 중대재해가 발생했던 40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재해발생의 원인에 대한 산업안전 진단을 3개월간 실시하고 노동청의 위탁으로 1969년 7월 25일부터 8월말까지 전국 22개 사업장에 대한 안전보건진단을 실시하였다. 실제 기록은 위의 2가지밖에 없지만, 상황으로 봐서 노동청의 위탁으로 연도별로 안전보건진단을 실시한 것으로 예상된다.

77년 9월 1일에는 남산케이블카 사고(와이어절단으로 시민 17명이 갇히는 사고)로 26일간 해당 케이블카에 대한 안전진단과 보수작업을 실시했다. 이 내용으로 봐서 주요 사고 발생 시 정부의 요청으로 안전진단을 실시한 것으로 예상된다.

그 외에도 명확치 않지만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 G.M KOREA(대우자동차의 전신)의 부천공장 및 부산공장 등의 사업장 요청 시 안전진단을 실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68년 10월에는 ‘인력관리와 기업경영’ 세미나를 개최했다. 협회 사무총장은 그해 11월 17일부터 21일까지 인도봄베이에서 개최된 ‘제5차 아시아 산업안전보건회의’에 참석(국내 안전보건유관기관 최초로 국제 세미나에 참여)했다. 또한 75년 8월 20일 노총회관에서 한국노총과 ‘산업안전과 보건에 관한 세미나’를 공동 개최했는데, 당시 이근희 사무총장은 안전의 중요성을 대내외적으로 설파했다.

72년 5월 12일에는 유공 울산공장 무재해 1백만 시간 돌파 기념으로 협회 이사장 명의의 표창을 수여했다. 그 외에도 지역별로 무재해 기업에 대한 표창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왔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협회는 안전보호구 첫 전시회를 한양대학교에서 개최했으며, 학술연구 용역사업도 시행했다. 특히 정부의 요청으로 ‘안전점검 기준’, ‘보호구 편람’, ‘작업안전관리 개선’에 대한 연구용역 사업을 실시했는데, 이는 정부의 제도개선 및 안전문화 활동에 효율적으로 활용되었다.

한편 산업발전 초창기 한 지역의 중소화학약품 생산 공장에서 기술팀의 안전부주의로 인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여러 사람이 사망, 화상 또는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제대로 된 방독마스크나 안전모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30대 중반의 한 근로자는 최소한의 안전수칙을 잘 지키면서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었다. 당시 사고의 충격과 망연자실했던 심정, 그리고 생존의 기쁨을 한모금의 담배로 표현한 사진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여기저기 공장들이 생산에만 열을 올리다보니 자연적으로 안전문제는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또 공해(公害)로 인한 피해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도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그야말로 산업의 빛과 그림자였다.

지독한 아황산가스가 무방비상태에서 대기(大氣)를 오염시켰으며, 농산물과 물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공장지대 인근의 가로수와 산림을 고사(枯死)시키는 엄청난 부작용이 엄습해왔다.

놀랍고 충격적인 그 상황은 내년 7월에 大편찬·출간될 『KISA 50년史』 책속에서 보다 자세히 수록할 예정이다.

필자가 당시 세계적인 특종기사로 보도한 공업단지 인근 강변에서 유독성 폐수로 오염된 강물을 먹고 자란 등이 굽은 잉어! 그 충격적인 사건은 지금도 경향신문 자료조사실에 가면 찾아 볼수가 있다.

당시 그 기사는 일본 산케이 신문과 미국 뉴욕타임즈 등에서 크게 인용보도를 하였으며 국회 보사분과위원회의 진상조사까지 확대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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