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⑤

1973년, 포항제철 준공으로 만난(萬難) 극복

KISA 50년史 줄거리에 우리나라 주요 근대역사 사건(정치·경제·사회문제)을 쓰는 이유는? 산업발전이나 산업안전 문제도 전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연결되어있기에 독자들과 국민들께 이해의 도움을 드리고자함이여 전국 학생들에게도 근대사 교육 자료가 될 것임을 밝혀둡니다. <필자>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1970년 1월 1일에는 남산 제1호 터널이 개통되었으며 전년도 납북되었던 대한항공 승객의 일부가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다. 3월 31일에는 일본의 적군파(赤軍派) 요원들이 일본항공의 요도호 여객기를 납치하여 김포공항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4월 3일에 승객 102명이 전원 석방되었다.

 


한편 4월 8일에는 서울시 마포구의 와우지구 시민아파트가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金玄玉)이 물러나고 아파트 기피현상이 퍼지는 등 큰 사회적 파장이 일어났다.

4월 22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제창하였고 7월 1일에는 전국적으로 우편번호제가 실시되었다. 8월 22일에는 병무청이, 그리고 같은 달 27일에는 관세청이 신설되었다. 10월 14일에는 충남 아산 근처에서 수학여행버스와 열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이때 버스에 타고 있던 경성중학교 학생들이 상당히 많이 희생되었다.

한편 11월 13일에는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전태일(全泰壹)이 분신자살하였는데 이로 인해 근로자의 안전과 인권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이후 노동운동이 촉진되었다. (당시 노동운동문제는 다음호에 상세하게 보도할 것임) 12월 15일에는 거제에서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남영호가 침몰하여 32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화물을 초과로 적재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져 큰 문제가 되었다. 12월 23일에는 정부종합청사의 본관이 준공되었고 같은 달 30일에는 회덕분기점과 전주를 잇는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971년 2월 9일에는 국가의 고도성장 및 중화학공업 육성을 목표로 하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발표되었고, 4월 27일에는 제7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어 7월 1일에 취임하였다. 5월 25일에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7월 26일에 제8대 국회가 개원하였다.



한편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북한 측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으며 이틀 후인 14일에 북한이 응낙하였다. 8월 23일에는 인천 실미도에 있던 특수대원 24명이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서울까지 진입하여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각 대학에서 반정부시위가 격화되자 10월 15일에는 서울 일부지역에 위수령이 공표되었으며 이후 12월 6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였다. 12월 25일에는 서울의 대연각(大然閣)호텔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163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을 당했다.

1972년 4월 19일에는 대한항공의 여객기가 국내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노선을 취항하였고 5월 29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직지심경(直指心經)》이 발견되었다. 5월 2일에는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의견교환을 활발히 하였고 7월 4일에는 평화통일원칙 등 7개의 항을 포함하는 ‘7·4남북공동성명’을 합의 및 발표하였다. 한편 10월 17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후 국회가 해산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언론 사전검열제가 시행되었다.


11월 21일에는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유신헌법이 확정되었으며 12월 27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네 번째로 당선되어 취임하고 유신헌법을 공포하였다. 12월 2일에는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 전기 과열과 합선으로 인한 화재가 일어나 51명의 사망자와 7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973년 2월 27일에는 제9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3월 3일에는 한국방송공사법에 의거하여 한국방송공사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이 창립되었다. 5월 5일에는 어린이날을 맞아 서울 광진구의 어린이대공원을 개원하였다. 한편 7월 3일에는 포항제철이 준공되었으며 8월 8일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5일 만인 13일에 자택으로 귀환했다. 이후 한일외교문제로까지 번진 ‘김대중 피랍 사건’은 11월 2일에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총리와 회담 후 종결되었다. 11월 16일에는 호남·남해 고속도로의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호남~남해고속도로 개통

역사를 잠시 뒤돌아보면, 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말할 것도 없지만 71년 크리스마스 밤에 발생한 대연각 호텔 사건도 100% 안전불감증에서 빚어진 대참사였다. 사전에 안전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다면 이런 참담한 사건사고는 없었을 것이고 그 아까운 생명들의 희생은 없었을 것이다.


와우아파트는 서울시의 고민이었던 무허가 건물을 줄이고 그 대신 서민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취지하에 건립된 아파트였다. 즉 와우아파트는 무허가 건물을 줄여나가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서민아파트 건설 계획의 하나였던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한국사회의 전시행정, 안전무시, 부정부패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고였다. 건설사의 비리와 감독기관의 비리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낸 큰 인재(人災)였다. 너무 빠른 시간에 충분하지 않은 예산을 들였으며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로 인해 이미 예고되어있던 사고였다.

대연각 호텔 화재는 성탄절 기분에 도취된 안전담당자들의 태만이 부른 희대의 사건이었고 이 날 투숙객 중 30대 한 여인은 얼마나 다급했으면 완전나체로 창문을 뛰어내리다가 사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연이은 대형 안전사고로 박정희 정부는 몹시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박대통령은 관계 장관들을 질책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태준회장과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포항제철공장(현, 포스코)를 준공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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