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 ⑧


1984~1987년 산업안전 분야 및 협회 역사 

1980년대 중후반 중화학공업과 기계, 전자 등의 조립가공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수출규모가 1985년에는 300억 달러, 1988년에는 500억 달러를 달성하게 됐다. 수출 상품의 대부분도 공산품이 차지하게 된다.

당시의 산업재해 현황을 살펴보자. 당시 산업의 발전과 함께 대형 산업재해도 꾸준히 발생하면서, 산재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란은 계속됐다. 특히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산업재해의 최악의 참사로 기억되는 인도의 보팔 참사사건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산업현장의 사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분야에 있어 1980년대 중반은 1981년 12월 31일 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1984년 ‘산재 10% 감소 운동’, 1987년 ‘산재예방 장단기 대책’ 등으로 산업안전 분야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강화된 시기이다. 이에 산업안전에 대한 범국민적 분위기가 형성됐던 시기로 평가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나라의 산업재해율이 1986년 처음으로 2%대에 진입하게 되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때부터 안전관리자 교육

당시의 대한산업안전협회 활동사항에 대하여 살펴보면, 이때부터 기존의 안전관리자교육, 종합안전진단, 무재해운동 추진 등의 사업 외에도 안전기사 보수교육, 안전안전보건관리책임자 교육, 사업주교육 등 다양한 교육 사업을 시행하기 시작하게 됐다.

아울러 지금까지 협회 교육 사업과 안전기술 사업의 주력 사업인 관리감독자교육, 안전관리대행의 실시기관으로 1987년 지정을 받고, 본격적인 사업의 추진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협회는 1980년대 중반 일본의 중앙노동재해방지협회(JISAH)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그들의 선진안전기술을 도입·확산하는데 주력하여 다소의 성과를 보기도 했다.

1985년에는 직원 일부가 JISHA주최의 ‘제로재해운동 프로그램 연수회(10월 14일~20일)’에 참가, 일본의 제로재해운동 기법을 습득하여 당시 범국가적으로 추진했던 무재해 운동을 위한 ‘위험예지훈련’ 기법을 정립시켰다고 한다.

또한 1986년 6월 20일과 11월 20일에는 JISHA 간부들이 직접 본 협회를 방문해 협회의 ‘국제산업재해예방기기 및 보호구 전시회’에 참석하고, 양 기관이 산재예방에 관해 상호 협력을 강화키로 한 것도 협회 역사에 있어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1986년 10월에는 JISHA 주최로 일본녹십자 전시회의 일환으로 열린 ‘국제회의’에 참여, 세계 여러나라의 정부 및 재해예방기관 실무자와 ‘환경관리’, ‘재해예보 및 경보의 시스템화’, ‘고령화 사회의 대응’ 등을 주제로 논의를 진행했는데, 이 역시 국제 협력사례의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산업의 안전 역사는 노동자 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80년대 중반,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던 한 사건, 구로1공단 내에 있던 ‘대우어패럴’의 노조 탄압 이야기를 그 한 예로 쓰는 것이다.

대우어패럴은 대우그룹 계열의 의류 봉제 수출 회사로 종업원만 2,000명에 이를 정도로 봉제업계에서는 규모가 상당히 큰 회사였다. 그럼에도 당시 여공 중심의 생산직 사원 임금은 상당히 열악한 편이었다. 게다가 임금이나 복지 측면에서 관리직이나 사무직과의 차별이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면서 가뜩이나 열등감에 젖어 있던 생산직 사원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례로 관리자와 사무직에게는 상여금이 400%나 지급됐음에도 생산직 여직원들에게는 200%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가 결국 노조 결성을 유발했고 이후 노조는 회사 측의 각종 탄압에도 불구하고 더욱 단결력을 과시해 갔다. 1984년 회사 측이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강제로 탈퇴를 강요하는 바람에 탈퇴자가 속출하자 노조 집행부는 이를 폭로하여 사회 여론화시키는 한편 당시 야당인 민한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생산직 노조는 1985년 봄에 김우중 당시 회장과 직접 협상을 거쳐 단체협약을 체결했으나 6월로 접어들면서 갑자기 노조 간부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임금협상이 끝나고 나서 어느 때보다 노사관계가 평화롭던 시점이었다. 갑자기 두 달 전의 노동쟁의를 문제 삼은 것은 누가 봐도 정부 내 공안정책상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조치였다.

 


노조 집행부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에 노조 조합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때마침 같은 날 구로공단 내 민주노조 간부들과 구로지역 해고자 활동가 등 190명이 노조 간부 합동 교육에 참가하고 있었다. 연행 소식이 전해지자 교육장에 있던 참가자들 사이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가 일거에 폭발했다.

마침내 구로공단 내에 공장이 있는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의 노조 간부들이 동맹파업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지난 시절 노조운동이 사별로 격파 당해왔다는 사실을 반추하면서 이번에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당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싸워야 한다는 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월요일인 6월 24일 오후 2시를 기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가기로 일정을 짰다.

이들 각사가 동맹파업을 결의할 수 있었던 데는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도 큰 역할을 했다. 서울 구로공단과 인천 지역의 공장에는 이미 수많은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침투해 있었다. 나중에 ‘구로동맹파업’의 주모자로 수배 받게 된 심상정(현 정치인)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서울대 여학생회를 만든 경력이 있는 심상정은 1980년 솔선해 노동현장으로 달려간 강골이었다. 이러다보니 우리의 안전업무에도 직·간접 영향이 있었고 한동안 업무가 휴업 상태였을 정도로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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