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A 50年史, 줄거리가 될 스토리 ⑨

또 한번의 역사 격동기였지만 협회 안전업무는 서서히 발전

1987년 초에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6월 9일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군 사망사건으로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사회 현상이 이런 험난한 분위기였으므로 자연 산업현장의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그러나 우리 협회는 최선을 다해 안전의무를 이행했으며 안전업무는 서서히 발전했다.

올림픽 해인 1988년에는 600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했을 정도로, 경제의 대폭적인 성장이 있었다. 산업구조도 기존의 경공업, 중화학공업에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반도체, 전자제품, 컴퓨터, 자동차, 선박 산업 등으로 변화했으며, 기술 수준이 높은 IT 산업 제품의 수출이 많아졌다.

우리나라 산업재해 중 가장 큰 화두가 되었던 원진레이온 사고가 1988년 세상에 알려지면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건은 근로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 안전설비 없이 작업하다 이황화탄소와 황화수소 가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사고를 말한다.

1993년 원진레이온이 폐쇄되기까지 이황화탄소, 황화수소 중독으로 15명이 사망하고, 이후에도 97명의 근로자가 사망했다. 또 지금까지 1,000여명에 가까운 근로자들이 중독증에 따른 직업병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 가장 안타까운 사고는 15세 어린 근로자 문송면 군의 수은 중독으로 인한 사망 사고였다.

이 사고로 인해 산업현장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안전 문제가 다시금 논란이 됐으며,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해 1981년 제정 후 한 번의 개정도 거치지 않은 산업안전보건법을 1990년 1월 13일 전면개정 공포했다. 이로 인해 안전과 관련한 법체계는 더욱 세분화 구체화됐다. 따라서 이런 불미스런 사건과 안전사고 때문에 우리 협회의 존재 이유도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역부족일 때도 없지 않았다.

그 후 정부는 1991년에 산업안전 분야의 중장기 계획인 산재예방 6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산재예방에 대한 범정부적 대응을 천명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재현황을 살펴보면 1990년에 처음으로 재해율이 1%대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1993년에는 산업재해자가 10만명 미만으로 줄어드는 성과가 나타난다.

안전협회 활동사항

협회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1987년 12월 한국산업안전공단의 설립으로 협회의 일부 역할이 공단으로 이관됐지만, 협회는 안전관리 대행사업의 시작을 통해 그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온 것은 물론,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협회는 1988년 1월부터 6개월간 인천, 경기, 충남, 대구, 경북, 부산 등 5개 지회내 공단지역에 소재하는 사업장들을 대상으로 안전관리대행 시범사업을 실시했다. 평균 51.8%의 재해감소 성과가 나타날 정도로 시범사업은 대성공이었다.

시범사업을 통해 재해감소에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자, 노동부는 1988년 9월 20일 안전관리대행업무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여 그해 10월부터 대행제도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협회는 지회단위로 안전관리대행기관을 지정받게 됐다. 1988년 10월 안전관리대행지정을 최초를 지정받아 대행업무를 시작했는데, 당시 지정인력은 60명이었으며 관리사업장은 1,157개소였다. 그리고 협회는 1989년까지 17개 지회, 4개 출장소가 지방노동사무로로부터 대행기관으로 지정받아 대행사업을 시행하게 된다.

협회의 안전관리 대행사업의 성과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대행사업을 통해 얻어진 경험과 노하우를 소규모 영세사업장의 안전관리에 적용시키는데도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협회는 1992년 5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전국 21개 지회에서 총 1,218개 사업장들을 대상으로 안전관리 대행과 동일한 서비스를 무료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국고 지원을 받아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안전관리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게 된다.

협회는 지금까지 교육사업의 중점을 이루는 관리감독자 교육도 이때 처음 실시하게 된다. 1987년 11월 9일 관리감독자 교육기관으로 지정받아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간 연 12시간 교육과정을 개설해 총 21,343명의 관리감독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행한다. 당시 교육인원은 1988년 1,982명, 1989년 5,567명, 1990년 13,794명 등이었다.

그 후 협회는 1990년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에 의거, 그해 11월 24일 지정교육기관으로 지정되면서 이듬해부터 연 24시간 교육과정으로 관리감독자 교육을 확대 개편하여 교육사업의 중점 교육과정으로 육성한다. 강사진만 협회 임직원 외에 대학교수 및 기술사, 관련분야 전문가, 사업장 안전관계자, 유관기관 전문가 등 연 5,0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매우 활성화됐다.

이외에도 협회는 이 시기 안전관리자 자격인정 교육기관(1988.05.12), 교육훈련기관(1990.1.25), 사업내 안전보건교육 지정교육기관(1990.11.24), 안전관리자보수교육 업무위탁기관(1992.3.28) 등으로 지정되어 각각의 교육사업을 충실히 수행해나간다.

 


안전문화 확산 활동

1988년 협회는 산업안전대회, 국제산업재해예방기기 및 보호구전시회 등을 개최하지만, 1987년 공단의 설립으로 해당 행사는 1989년 이후 공단으로 이관된다. 대신 협회는 그 이후에도 산업안전보건강조주간 지방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대국민 대상으로 안전문화를 지속적으로 확산해나간다.

그리고 1989년 7월 21일 전국안전관리성공사례발표대회, 1990년~1991년 전국산업안전 웅변대회 등을 통해 사업장의 안전의식을 향상시키는 노력도 꾸준히 펼쳐왔다.

1992년에는 노사정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무재해추진협의회’와 매일경제신문사가 공동으로 추진한 ‘밝고 건강한 무재해일터 만들기 범국민 1천만명 서명운동’에 협력 기관으로 적극 동참하여, 92년 372,060명, 93년 88,600명 등 2년간 총 460,660명의 무재해서명을 받는 큰 성과를 냈다.

이외에도 무재해운동의 한 기법이자, 지금껏 안전관리에 있어 기본적인 준수사항인 ‘5C 활동(복장단정, 정리·정돈, 청소·청결, 점검·확인, 전심·전력)’을 1990년 7월 20일 선포하고, 그 의미를 사업장에 확산 전파시키기 시작한다.

참고로 위의 시기(1988년~1993년) 협회를 거쳐간 회장은 제13대, 제14대 김숙현 회장(1983.1~1989.12), 제15대 김선홍 회장(1989.12~1992.12), 제16대, 제17대 강진구 회장(1992.12~1998.12) 등이다. 지금은 없어진 직위지만 그때는 부회장제도가 있었으며 당시 부회장은 김원갑 부회장(1983.1~1989.12), 홍종래 부회장(1989.12~1993.9), 강근희 부회장(1993.9~1998.12)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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