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

100년 장수 기업문화 정착 위해 ‘안전 최우선’ 실천을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지나 어느덧 겨울 길목이다. 이즈음이면 충남 예산 수덕사 인근에 있는 고향집이 생각난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는 늦가을, 초겨울이면 뜨락의 감을 수확하면서 가지마다 몇 개의 홍시를 남겨두었다. 겨우내 굶주리는 까치 등 날짐승을 위해 일부러 따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는 왠지 모르게 서럽고 야속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시골 소년의 못난 투정에 불과했다.

주역(周易)에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란 구절이 있다. ‘큰 과일은 먹지 않고 남겨둔다’는 뜻으로 아무리 현 상황이 어려워도 미래를 위한 씨앗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할머니는 까치밥을 통해 석과불식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실천했던 것이다. 필자는 안전문화가 미래세대에 새로운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석과(碩果)이며, 까치밥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지난해 발생한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안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국민안전처라는 국가재난안전관리 전담부처가 출범하는 등 안전관리시스템이 대폭 개선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은 여전히 안전후진국이라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전국 산업현장에서 9만909명의 재해자가 발생했다. 이 가운데 1850명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리는 매일 다섯 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불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산업재해만 놓고 봤을 때가 이 정도다.

한국에서는 1960~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에 ‘생산제일문화’와 ‘빨리빨리문화’가 생겨났다. 이는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원동력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안전을 등한시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최근 산업계의 뜨거운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위험의 외주화’ ‘산재 은폐’ ‘감정노동’ 등이 모두 안전문화가 제대로 정착·확산되지 못해 생긴 병폐다. 어제까지 ‘생산이 우선’이었다면 오늘부터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과거가 ‘빨리빨리’였다면 지금부터는 ‘바르게 실행’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것이 석과불식의 자세로 안전문화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지금 당장은 조금 불편하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안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작은 실천이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앞으로 5년, 10년 후에는 안전문화라는 정말 맛있는 과실이 우리 사회 곳곳을 행복하고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자연스럽게 안전후진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것이다.

물론 안전문화가 하루아침에 정착될 수는 없다. 국민안전처, 고용노동부 등 몇몇 기관의 노력만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사·민·정 모두가 안전문화라는 석과(碩果)의 씨를 품어야 한다. 안전문화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특히 기업 경영진은 안전문화를 솔선수범해 펼쳐 나갈 필요가 있다. 기업의 안전은 경영자의 마인드에 의해 판가름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안전문화가 현장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경영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기업 경영진은 안전에 소요되는 비용이 단순히 소모된다는 인식을 버리고 투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듀폰이나 카길 등이 100년 이상의 영속기업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안전과 안전문화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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