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내년 1월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5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본격 시행된다. 적용 대상이 되는 대기업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긴장감이 역력한 모양새다.

이 법을 두고 갈등의 불씨도 여전하다. 지난 9월 28일 시행령 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면서 하위법령 제정 작업은 사실상 마무리 됐지만, 노동계와 경영계는 극명한 입장 차이로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경영계에서는 법의 모호성 등을 이유로 법 집행 과정의 부작용을 우려하며 보완 입법을 요청하고 있고, 노동계에서는 시행령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며 당초 법의 의미가 퇴색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안전보건관리 패러다임의 대대적인 변화가 예고된 만큼 이러한 진통은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다. 앞으로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실효성 높은 해법을 도출하고 보완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바로 2024년까지 법 적용이 유예된 중소사업장(50인 미만, 건설업의 경우 50억원 미만)의 고질적인 산재 문제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 발생한 산재 사망사고의 81%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나왔다. 이들 사업장에서의 산업재해를 감소시켜야만 중대재해처벌법이 입법 취지를 달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까닭에 정부는 최근 이들 사업장을 대상으로 안전점검 및 감독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고용부가 지난 8월 30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억 원 미만 건설 현장 및 근로자 50인 미만의 제조업 등 2665개소를 대상으로 ‘산재 사망사고 감축 위한 집중 단속기간’을 운영한 결과 전체의 33%에 해당하는 882개소에서 산안법 위반사항이 적발됐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적발된 882개소 중 188개소를 다시 불시점검한 결과 13개소(6.9%)에서 안전조치 의무 소홀이 재차 확인됐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중소 사업장은 자본과 인력이 풍부한 대기업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부족한 재정과 인력 등으로 인해 안전관리가 취약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는 대상은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사업장이다.

◇영국 기업살인법 유죄판결 대부분은 ‘중소사업장’
그렇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의 모티브가 된 기업살인법을 먼저 도입한 영국의 상황은 어떨까?

안전 선진국으로 손꼽히는 영국에서는 지난 2008년 4월 6일부터 ‘기업살인법(CMCHA 2007)’을 본격 시행했다.

첫 유죄판결은 법 시행 3년 뒤인 2011년에 나왔다. 개발 현장에서 토양의 샘플을 채취하기 위해 굴착된 구덩이에서 홀로 작업하던 직원(지질학자)이 지반붕괴로 매몰돼 사망한 인재였다. 기소된 기업은 8명의 직원이 일하는 소규모 사업장이었고, 영국 법원은 사업주의 안전조치 소홀 혐의를 인정해 최종 유죄판결을 내렸다. 기업에 부과된 벌금은 연매출의 115%에 달하는 38만5000파운드, 우리 돈 약 6억 원 정도였다. 기업은 지불 능력이 없어 항소했으나 결국 패소했고, 결과적으로 폐업 수순을 밟았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에서 기업살인법으로 기소된 기업 40여 곳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은 기업은 약 30곳으로 추정된다. 같은 기간 영국 내 산재 사고 사망자 수가 총 1,923명인 점을 감안할 때 크게 많지는 않은 수치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유죄판결을 받은 기업 대부분이 중소사업장이라는 것이다. 보고체계가 복잡하고 사업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대기업의 경우 경영진의 안전의무 소홀을 증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반면, 단순명료한 소규모 사업장은 비교적 수월했던 것이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주된 배경으로 지목된다.

◇중소사업장 안전역량 강화하려면 정부의 지원 확대 시급
국민들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공감하고 지지했던 이유는 강력한 처벌이 아니라 노동자가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 조성을 위한 기업들의 의무와 책임을 충실히 해달라는 데 있다. 그동안 성장과 발전에 매몰돼 도외시 해온 안전의 소중한 가치를 기업인들이 공감하고 경영 마인드를 바꿔달라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중소사업장은 부족한 인력과 재정으로 안전을 ‘잘하고’ 싶어도 현실적인 여건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오는 2024년 50인 미만 사업장을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기에 앞서 정부가 예산 지원을 대폭 늘려 이들의 자율안전관리 역량을 높이는 데 매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산재예방 예산 지원 규모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의 산재예방 예산의 99%는 사업주들이 부담하는 산업재해보험료로만 구성돼 있고, 특히 정부의 일반회계전입금은 단 0.22%에 불과하다.

노사정이 지난 2006년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산재예방 사업에 대한 국고지원 규모를 기금 지출예산 총액의 3%를 목표로 연차적,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합의 했지만, 여전히 이행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수년째 합의에 대한 이행을 촉구하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일반회계 지출의 경우 국가의 채무 등을 고려할 때 재정 재원 배분의 효율성이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하지만 안전 사각지대에 놓인 중소사업장의 안전관리 수준을 개선하지 못하면 앞으로 3년 뒤 다가올 ‘진짜 중대재해처벌법’의 충격에 흔들릴 중소사업장은 한두 곳이 아닐 것이고, 그로인한 경제적 손실 또한 상당할 것이다.

일터의 안전문화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중소사업장의 안전역량 강화를 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지금부터 시작돼야 한다. 때를 놓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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