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로 읽는 안전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 : 뉴시스)
서울 성동구 서울숲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 : 뉴시스)

모든 생명체는 원초적으로 안전한 삶을 추구한다. 안전한 삶은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나무도 언제나 안전한 삶을 위해 목숨 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는 안전한 삶의 기본상식이다.

나무가 이 같은 방식을 선택하는 이유는 더불어 살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무는 공존을 통해 공생할 수 있다는 원리를 깨달은 존재이다.

안전한 숲에는 떨기나무와 큰키나무, 늘푸른나무와 갈잎나무들이 함께 살아간다. 식물학에서 떨기나무는 다 자랐을 때의 높이가 10m 미만을, 큰키나무는 10m 이상을 뜻한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는 110m가 넘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자이언트레드우드, 즉 미국삼나무이며 흔히 세쿼이아라고 부른다. 중국 원산의 메타세쿼이아의 ‘메타’는 세쿼이아 ‘이후’라는 뜻이다. 메타세쿼이아는 그동안 지구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가 중일전쟁 당시 발견했다. 간혹 식물학자들 중에는 장미과의 사과나무와 복사나무 등 6m에서 10m 사이까지 자라는 나무를 중간키나무로 분류한다.

모든 생명체는 경쟁하면서 생존할 수밖에 없다. 나무도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무 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생명체와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나무들은 경쟁하면서도 죽기 살기로 경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공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들은 아무리 빽빽한 숲일지라도 햇볕을 받아들일 수 있는 틈을 만든다. 어떤 생명체든 서로 경쟁하면서도 일정한 틈을 만들어야만 ‘사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 사이 좋은 관계는 안전한 삶을 위한 상식이다.

간혹 인간들은 안전한 숲을 무시한 채 특정한 나무만 선택한다.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소나무,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등 일부 나무들을 제외하고 ‘잡목’으로 인식한다. 지금도 주말에 집 근처 산에 가면 나이 드신 분들이 종종 낫으로 산책 길가의 나무들을 잘라버린다. 나이 드신분들에게 나무는 생명체가 아니라 함부로 죽여도 괜찮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 이유없이 죽여놓고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나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우리나라 정부나 지자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와 지자체의 나무에 대한 인식은 가로수 정책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가로수는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아니라 그저 도시의 미관에 필요한 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로수 수종의 삶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로수의 종류마다 키가 얼마나 자라는지, 가지는 옆으로 얼마나 뻗는지, 꽃은 언제 피는지, 열매는 언제 익는지 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그 결과 우리나라 가로수 중에서 가장 많은 은행나뭇과 갈잎큰키나무 은행나무의 경우 암나무에 열매가 열려 떨어지면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수 십 년 동안 살던 나무도 다른 나무로 교체해버린다. 버즘나뭇과 갈잎큰키나무 양버즘나무는 가지가 전깃줄에 닿거나 인근 상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봄마다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더욱 심한 경우는 아파트마다 조성한 나무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메타세쿼이아는 전부 목이 잘려버렸다. 아파트 높이 만큼이나 자라는 나무를 애초부터 심지 말아야 하지만, 오로지 준공 심사에 필요한 나무를 심다 보니 벌어진 비극이다.

인간의 나무에 대한 이러한 선택은 만행이다. 이같은 만행은 생명체에 대한 본초학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본초학은 인간이 고대부터 가진 식물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식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고, 모든 식물을 약효로 인식하는 학문이다. 이같은 식물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국민들 머릿속에 여전히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식물에 대한 본초학적인 인식은 안전한 삶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태도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산업재해도 식물에 대한 본초학적인 인식처럼 생명체에 대한 생태의식의 부재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생명체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산업재해는 생명체를 상대적인 가치로 인식하는 순간 일어난다. 그 어떤 것보다 생명의 안전을 우선해야 하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생명체보다 이익을 우선한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나도, 관련 법령을 만들어도, 책임자들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에도 똑같은 재해가 반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안전한 삶은 다짐과 법령 마련으로 실현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생명체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라는 생태의식을 확고하게 가질 때만이 가능하다.

생태(Eco)는 학자마다 다양하게 설명하지만 필자는 ‘평등한 관계성’으로 파악한다. 생태의식은 모든 생명체의 가치가 동등할 뿐이고, 단지 역할만 다르다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갑질은 결국 생태의식의 부재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생태의식만 있다면 한 그루의 나무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산업재해도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산업현장에서는 산업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안전 교육이 이루어지지않고 있다.

산업안전교육은 반드시 생태의식의 교육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산업현장의 노동자를 대상으로만 생태의식을 교육할 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최고경영자를 비롯한 산업 현장의 책임자를 대상으로 생태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산업재해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

<글.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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