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재활원 김종배 재활보조기술연구과장

최근 우리나라 중부지방을 휩쓴 집중호우는 순식간에 서울도심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차들이 서울 도심을 떠다녔고, 산사태가 강남 고급주택가를 가히 쓰나미 같이 덮쳤다. 거대한 자연재난 앞에 인간은 무력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대피하기 힘든 재난상황에서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들은 어떠할까? 쉽게 말해 손 써볼 방법이 없다. 장애인에게는 재난이 재난이라는 상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삶의 끝’이다.

이번 폭우로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천이 범람하면서 인근의 장애인 재활치료시설인 삼육재활센터가 한때 고립돼 환자와 원생, 직원 700여명이 건물 상층으로 대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하와 1층 3분의 2정도 높이까지 흙탕물이 들어차면서 재활센터 전체가 정전됐고 유선전화도 불통됐다.

다행히 센터 임직원들의 신속한 대처로 요양병동 환자 100여명, 요양원 노인 50여명, 재활환자 230여명, 재활원 학생 100여명 등 700여명은 건물 2, 3층으로 대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요행에 불과했다. 만약 우면산 산사태처럼 건물 3층 높이까지 피해가 발생했다면, 더 이상 대피할 여력도 없는 이들은 앉은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

일본의 쓰나미, 한국의 집중호우 등은 기상청이 예측할 수 없었던 ‘기상관측 사상 최고’라는 딱지가 붙은 기상이변들이다. 많은 과학자들은 이런 기상이변에 의한 사상 초유의 대재난들이 앞으로 계속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에선 기상이변에 따른 재난대응대책이 시급히 보강돼야 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일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의 재난대응에 대한 대책을 말하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유니버설디자인(UD : Universal Design)이란 말이 있다. 건축 및 산업디자인 학계에서 주로 쓰이는 말로, 제품이나 건물·공간 등을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인과 젊은이, 여성과 남성 등 모든 사회 구성원이 다 같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앞으로는 이 UD개념이 재난대피 시설이나 재난대응 제품에도 적용됐으면 한다. 재난대응이야 말로 모든 구성원을 적용대상으로 해야 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국 대학에 있을 때 과를 대표해서 학교 화재대응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당시 알게 된 것인데, 미국의 대부분 건물에는 화재와 유해가스 등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사방이 특수벽으로 만들어진 안전구역(Safe Zone)이 각층마다 설치돼 있다.

화재가 났는데 외부로의 대피가 불가할 경우 각 층에 설치된 안전구역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기다리는 것이다. 소방대원은 출동하면 제일 먼저 사다리차를 안전지대로 접근시켜, 이곳에 대피한 사람들부터 구한다. 실로 필자와 같은 장애인에는 가장 좋은 대피방법인 것이다.

미국은 건물 안전구역 설치 관련 법과 가이드라인이 잘 마련돼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장애인을 위한 피난구역 (Refuge Area)가이드라인도 포함된다. 우리나라도 재난대응체계에 대한 대수술을 벌이고 있는 지금, ‘유니버설 재난대응 시스템’의 도입·정착을 필히 고려해야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장애인이 재난재해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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