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씨 영국안전보건협회(IOSH) 前 회장 인터뷰

최근 우리 정부가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은 위험성 평가 중심의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을 통해 오는 2026년까지 사고사망만인율을 0.29‱까지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일터 안전 수준이 정체기에 접어든 만큼 처벌과 규제 의존도가 높은 기존의 방식에서 탈피해 사고 예방을 위한 기업의 자율적, 자발적 노력을 이끌어내는 데 더욱 집중한다는 게 정부의 복안이다. 영국 등 안전선진국에서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으로 중대재해 감축에 성공한 사례를 참조했다.
 

과연 국가에 의한 강력한 규제와 처벌보다 자율성 및 자발적 노력에 초점을 맞춘 패러다임의 변화가 한계에 직면한 일터 안전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영국 ‘안전 전문가’로 손꼽히는 존 라씨(John Lacey) 영국안전보건협회(IOSH) 전(前) 회장을 만나 중대재해 감축의 원동력과, 그만의 안전 철학, 우리나라의 산업안전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Q.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1970년대부터 안전 업무에 종사해 왔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로벤스 보고서(1972년)’를 계기로 일터안전보건법(Health and Safety at Work Act 1974)이 제정되는 등 안전보건 분야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던 시기였습니다.

본래 저는 ‘안전인’이 아니었습니다. 인쇄업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우연한 기회에 건설업계로 이직하며 안전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현재 영국 내 건설업종 사고 사망자 수는 30명 정도에 달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 해 2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건설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었습니다. 비참한 현실을 직접 목도하며 자연스레 일터 안전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 같은 관심은 영국의 대표적인 안전전문가 단체인 영국안전보건협회(IOSH)로 이어졌습니다.

IOSH 회원이 된 이후 저는 전문성을 함양하는 동시에 건설업 산재예방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IOSH 내 건설안전 분야 협의체를 이끌며 리더십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 지난 2003년 IOSH 회장으로 선출됐습니다. 회장으로 취임 후 건설업종 안전보건 증진을 위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특히 ‘건설설계관리규칙(Construction Design management Regulation 2015)’ 도입에 참여해 안전에 대한 발주자, 주설계자, 원도급자 등의 협업과 책임 강화를 이끄는 데 기여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재는 안전관리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가운데 전 세계를 돌며 글로벌 안전보건관리시스템(ISO 45001)에 대한 개념 소개와 인증 대중화에 나서고 있으며, 아시아 태평양 산업안전보건기구(APOSHO) 명예회원 등으로도 활동하며 개도국 등의 안전보건 증진을 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습니다.

Q. 영국은 대표적인 안전선진국으로 평가받습니다. 중대재해가 감소하게 된 배경, 그리고 그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일터에서의 안전보건은 영국 내에서도 여전히 도전적인 과제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영국 내 사고사망자 수는 꾸준히 줄었고, 사망십만인율도 2.1(1981년)에서 0.38(2021/22년)로 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한 해 123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있고, 특히 건설업종에서 가장 많은 사고사망자(30명)가 나오고 있습니다. 일터든 삶터든 그곳이 어디든 사람이라면 다치거나 아파선 안 된다는 게 저의 철학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영국에서 중대재해가 눈에 띄게 감소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로벤스 보고서를 계기로 제정된 일터안전보건법(HASAWA)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할 때까지 하라(so far as is reasonably practicable, SFAIRP)’는 것입니다.

즉, 기업 노사가 사업장 규모나 여건에 맞춰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일터의 위험요인을 세심히 살피고 그에 따른 개선 및 예방조치를 실시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위험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위험을 개선하는 시간, 비용 등이 기업 경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불균형을 초래하는 등 합리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경우라면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무방한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사업주가 그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선이 어디까지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법령의 이해와 준수를 돕는 지침(Guidance), 특정 상황과 구체적인 사례 등을 제시한 승인실행지침(Approved Codes of Practice), 사업주 스스로 위험을 통제하기에는 위험이 높아 의회의 승인을 통해 절대적 준수사항을 마련해 둔 규칙(Regulation) 등을 기반으로 사업주의 자율안전관리를 돕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승인실행지침은 궁극적으로 법적 강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준수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사고가 발생해 사업주가 안전보건법 위반으로 기소됐을 경우, 재판에서 승인실행지침의 이행 및 준수 여부를 들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기업 노사가 사업장 규모나 여건에 맞춰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선까지 자율적으로 위험을 발굴‧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온 것이 영국에서 중대재해가 감소하게 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지난해 한국에서도 영국의 법인과실치사법과 유사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습니다. 하지만 일터 안전에 획기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영국에서 법인과실치사법(CMCHA2007)은 지난 2008년에 처음 시행됐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하거나 중대한 주의의무를 위반했을 경우 법인에 대해 무제한의 벌금, 구제명령, 유죄인정사실 공표 등으로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법인 뿐 아니라 사업주와 책임자 등 개인 역시 중대한 과실을 범해 일터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경우 관련법에 따라 최대 무제한의 벌금 및 최대 종신형까지 판결이 내려질 수 있습니다. 단 기업의 규모, 과실의 중한 정도를 감안해 벌금 수위와 형량이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법인과실치사법이 제정된 이유는 명료합니다. 안전보건에 전혀 무관심한 기업과 경영자를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는 있었습니다. 경영진과 책임자들이 과거보다는 안전보건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이 법은 제정 취지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 이 법으로 처벌된 기업의 대다수가 영세 소규모 사업장인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즉 역량과 자원이 충분함에도 안전보건에 신경쓰지 않는 기업을 처벌하기 위한 법임에도, 경영 구조가 복잡한 대기업 대비 경영진의 과실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는 영세 사업장이 주로 처벌 대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중대재해가 감소하기 위해서는 처벌과 규제는 차치하더라도 기업들의 자율안전관리 역량을 높이는 것부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존 라씨(John Lacey) 영국안전보건협회(IOSH) 前 회장이 영국의 '건설설계관리규칙(CDM Regulation 2015)'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존 라씨(John Lacey) 영국안전보건협회(IOSH) 前 회장이 영국의 '건설설계관리규칙(CDM Regulation 2015)'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Q. 자율안전관리에 익숙하지 않은 기업들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기업에서 자율안전관리를 전개해 나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위험성 평가(Risk Assessment)입니다. 영국의 경우 위험성 평가를 법으로 강제하고 있으며, 사업장에서 위험성 평가를 실시할 때에는 무엇보다 적합하고(Suitable) 충분하게(Sufficient) 수행토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영국 내에서는 위험성 평가가 안전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만큼 안전 업무를 종사하기 위한 국가자격을 취득하려면 위험성 평가 실기를 치러야 할 정도입니다.

위험성 평가를 수행할 때에는 반드시 포함돼야 할 아주 기본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점검 대상의 적정성 ▲위험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 및 범위 ▲관련 종사자들의 수를 고려한 중요 위험요인의 발굴 및 제거 ▲예방조치의 실현가능성 및 잔존 위험성 수준 확인 ▲관련 노동자 및 대표자 참여 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빈틈없는 위험성 평가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제3자 기관, 즉 안전전문기관을 적극 활용할 필요도 있습니다. 교차점검을 통해 내부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위험요인을 발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터를 구성하는 경영자, 관리자, 노동자 모두가 위험성 평가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자율안전관리의 시작이자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한국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 안전보건관계자 등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무엇보다 안전에 소요되는 비용과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전에 대한 비용은 투자이며, 노동자는 기업의 자산입니다. 과거 수익만 쫓아 기업을 키우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노동자 한 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 기업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물론, 조직 분위기가 망가져 생산력이 저해됩니다. 또 새로운 인력을 채용하고 훈련해야 하는 부가적인 비용도 훨씬 많이 소요됩니다. 안전에 대한 균형잡힌 투자가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한다는 인식을 꼭 갖춰야 합니다.

아울러 최근 일터 안전보건의 범위가 사고와 질병을 넘어 근로자들의 정신사회적 위험관리까지 신경쓰는 추세입니다. 이는 과거 인사(HR) 조직에서 담당했던 조직관리의 일이 안전보건 분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영자와 안전보건관계자 등은 일터 내 사회심리적 위험이 조직 및 구성원들의 업무 능력과 성과에 악영향을 미치는 점을 인지하고, 앞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안전보건관리를 전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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