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공지능(AI), 빅데이터(Big data),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 시대 핵심 기술은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지식혁명의 심화에 따른 기술혁신은 급속한 속도로 일터와 삶터 등 문명사회 전반으로 스며들어 기존의 것을 허물거나 대체하고 있으며, 때때로 융합을 통해 새로운 방식과 형태로 변화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특정 국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나타난다는 게 특징이다.

이 같은 기술들은 일반적으로 우리 삶의 편리와 풍요를 추구하며, 저성장, 고착화된 산업생태계에 혁신을 불러와 새로운 산업과 성장의 원동력을 창출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반면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도 공존한다. 다양한 신종위험(Emerging risk)을 촉발해 예기치 못한 안전 문제를 야기하고 우리 사회에 피해나 갈등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ChatGPT 사용자 급증에 따른 정보보안 및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 드론과 전기차·자율주행차의 기술적 결함에 따른 사고 위험, 일터와 삶터의 작업 및 생활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안전보건 위험의 출현 등은 지식혁명의 심화에 따른 혁신기술이 지닌 양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 같은 새로운 위험을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면 아래 드러나지 않은 신기술의 잠재적 위험성이 불확실(Uncertainty)하고, 복잡(Complexity)하며, 기존에 경험해보지 못한(Unexperienced) 것이다 보니, 시의적절하게 대응하거나 후속조치를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기술이 혁명(Revolution)과 혁신(Innovation)이라는 방탄 프레임의 보호 아래, 규제나 제도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도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대응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위험사회(Risk Society)’ 개념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을 크게 자연에 의해 초래되는 위험(Danger)과 사람에 의해 인위적으로 초래되는 위험(Risk)으로 구분했다. 그러면서 위험(Risk)은 ‘생산된 불확실성(manufactured uncertainty)’ 혹은 ‘생산된 위험(manufactured risk)’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인위적으로 초래된 위험이나 생산된 위험은 필연성(Inevitablity)을 지니고 있기에 위험을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생산된 위험을 줄이려는 노력이 체계화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위험사회는 다수가 위험에 대해 이야기 하며,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이 그 위험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그러한 움직임이 체계적으로 작동되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영국을 산업안전 선진국으로 성장하게 한 배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로벤스 보고서(1972년)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Context)을 엿볼 수 있다. 로벤스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7명의 로벤스 위원회는 영국의 안전보건정책 및 법규, 행정기관의 집행, 현장 작동성의 문제점 등을 전반적으로 진단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언 등을 보고서에 담았다.

위원회가 개선을 촉구한 사항 가운데 현재 영국 일터 안전보건관리의 근간이 되는 내용은 안전보건법규제(정부)와 자율안전보건관리(현장)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위원회는 일터 안전보건에 대해 실질적인 이해관계자인 근로자의 참여를 배제하는 특징을 지닌 법규제의 문제점을 꼬집고, 이로 인해 기업이 현장 안전보건에 관한 문제를 지나치게 국가에 의존하는 경향이 산업현장에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를 개선하려면 정부는 현장에서 지켜야 할 방대하고 세세한 규제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산업현장 구성원 모두가 자율적 안전보건관리 활동에 나설 수 있는 구조를 조성하고 그러한 환경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로벤스 보고서는 영국 내 일터의 위험을 관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었고, 영국 일터안전보건법(HASAWA, 1974년) 제정의 계기가 됐다. 현재 영국의 안전보건정책 및 집행은 ‘위험을 생산하는 이들이 위험을 통제하기 가장 최적의 위치에 있다(Those who create risks are best placed to control them)’는 원칙 하에 기업 노사 모두가 참여해 위험을 식별하고, 발굴하며 개선하는 위험성평가(Risk assessment)를 안전관리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또한 ‘합리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 때까지 하라(so far as is resonably practicable)’는 개념을 도입해 기업 스스로 자율안전보건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이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최근 우리 정부도 일터 안전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 이러한 접근 방식을 도입해 눈길을 끈다. 지난해 말 정부가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얘기다.

로드맵은 책임성, 현장성, 혁신성 등 세 가지 핵심 원칙을 기반으로 위험성평가 중심의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을 통해 오는 2026년까지 사고사망만인율을 0.29‱까지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일터 안전에 있어 큰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만큼, 처벌과 규제 의존도가 높은 종전 방식에서 벗어나 기업 노사가 스스로 위험을 발굴하고 개선해 나가는 자율적, 자발적 노력을 이끌어내는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는 게 로드맵에 담긴 정부의 복안이다. 이의 일환으로 최근 정부는 일선 현장에서 위험성평가 제도를 적극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평가 지침을 개정하기도 했다.

정부의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를 고려해보면, 우리 사회도 이제 위험사회 진입을 위해 이른바 ‘위험 거버넌스(Risk governance)’ 구축과 운영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위험 거버넌스는 위험을 대응할 때 행정적, 기술적 측면을 책임지는 정부, 그리고 위험평가와 소통을 담당할 광범위한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고려하는 개념(Aven & Renn, 2012)이다. 크게 위험평가(Risk assessment), 위험관리(Risk management), 위험소통(Risk communication) 등 세 가지로 구성해 볼 수 있으며, 광범위한 이해관계자의 위험인식이 동기부여가 되어, 이러한 세 가지 영역의 활동이 작동되는 것이 특징이다.

위험 거버넌스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위험관리의 목표, 절차, 방법, 범위 등을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데 있어 정부, 민간, 비영리단체, 시장, 국민 등 광범위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협력이 필수다. 이해관계자는 원활한 위험소통을 통해 위험을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찾고, 개선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자율적 노력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위험관리를 국가에 의존하는 데 길들여져있다. 위험을 해결하는 방안이 법제화되거나, 국가가 구체적으로 의무사항, 지시적 규제를 정해줄 때까지 행동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는 법을 실천해야 할 이른바 '수규자(受規者)'가 위험 개선을 위한 실천과 이행 여부를 판단할 때, 자신의 경제적 효용을 최대화할 수 있는 합리적선택(Rational Choice)을 하게 만든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업장 등 조직 측면에서 규제 기반 이상의 위험 개선을 위해 자율적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과 ‘법적 의무사항이 아니면 투자할 필요 없다’는 논리를 지닌 세력간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합리성에 기반한 효용성의 논리가 조직을 지배하는 곳에서는 위험 개선을 위한 자율적 노력이 경시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산업현장 전반에 만연해 있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기업 노사가 합심해 자율적으로 위험을 식별하며 개선하는 이른바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 분위기가 정착‧확산되기 위해서는 위험소통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전문가와 일반인, 사업주와 근로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등이 위험을 이야기하고, 위험에 대한 인식 차이를 줄여 궁극적으로 위험 개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때마침 정부가 올해부터 매년 7월을 ‘산업안전보건의 달’로 격상해 운영한다. 기존에 일주일간 진행되어 온, ‘산업안전보건 강조주간’이 확대됐다. 일터의 위험과 관련해 노‧사‧민‧정‧학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대폭 확대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오는 7월 한 달간 범국가적 차원에서 일터 안전보건에 관한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정부는 이 기간 의미 있는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풍성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구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단 정부 주도의 행사는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한계가 있는 만큼, 현장 중심의 위험소통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사업주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 조직 내 안전보건관계자, 관리감독자, 근로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안전보건관계자 등은 ‘참석’에 의미를 두기보다, 주제발표 등 ‘참여’를 통해 보다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연 "우리 사회는 위험사회(Risk society)인가?" 이 질문에 대해 현장도 답을 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의 달을 대하는 기존과는 다른 태도와 자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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