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의 비결
"전문인력의 역량 강화가 필수"

산업안전보건 선진국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국가 중 하나는 영국이다. 지난해 기준 영국 일터에서의 사고사망자 수는 135명(잠정)으로, 같은 기간 874명(유족급여 승인기준)이었던 우리나라에 비해 눈에 띄게 적다.

영국 내 일터에서 사고사망자가 적은 원동력 중 하나는 ‘자기규율 예방체계’가 꼽힌다. 앞서 우리 정부도 일터 안전보건의 획기적 개선을 위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영국 등의 사례를 참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간 영국에서는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고, 현재 일터 안전보건관리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글로벌 안전보건 전문가단체로 손꼽히는 IOSH(Institution of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의 로렌스 웹(Lawrence Webb) 회장을 만나 영국식 자기규율 예방체계 구축의 비결을 들어봤다.

로렌스 웹(Lawrence Webb) 영국안전보건협회(IOSH) 회장이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로렌스 웹(Lawrence Webb) 영국안전보건협회(IOSH) 회장이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Q. 영국식 자기규율 예방체계의 개념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현재 영국의 안전보건관리 환경은 “위험을 생산하는 이들이 위험을 통제하기에 가장 최적의 위치에 있다(Those who create risks are best placed to control them)”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정부는 위험을 생산하는 사업주가 위험을 체계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조언하는 ‘역할’과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관련 규제와 제도 역시 현장에서 자율적인 안전보건관리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마련돼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영국에서 모든 사업주는 법적으로 안전보건담당자(Competent person)를 한명 또는 그 이상 선임하거나 외부 안전보건컨설턴트를 활용하여 안전보건 업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특히 기본적으로 위험성평가(Risk Assessment)를 실시해야 하며, 상시 근로자 5인 이상을 둔 사업장의 경우 반드시 서면으로 그 내용을 기록해야 합니다. 물론 사업주나 기존 직원이 안전보건담당자로 선임되어 위험성평가 등의 업무를 직접 수행해도 되지만, 외부의 서비스를 활용하는 것이 더 전문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외부 컨설턴트를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종합해보면, 자기규율 예방체계는 기업이 내부의 안전보건담당자 또는 외부 안전보건컨설턴트 등을 활용하여 사업장의 규모나 특성에 맞게 기업운영 중 생산되는 위험을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업활동에 위험은 필연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사업주와 노동자들이 명확히 인식하고, 영리활동과 위험을 최소화하는 활동 간의 균형을 합리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 자기규율 예방체계의 핵심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Q. 영국 안전보건법규제의 특징과 기능 그리고 배경이 궁금합니다.
영국의 안전보건법규제 체계는 ▲일터안전보건법(HASAWA) ▲규칙(Regulations) ▲승인실행지침(Approved Code of Practice), 가이드(Guidance) 등으로 구분됩니다.

‘법’은 법을 실천해야 할 이들이 지향해야 할 사항을 목표 지향적(Goal-setting)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규칙’은 사업주 스스로 관리하기에는 위험이 높아 별도로 필요한 ‘절대적 준수사항’을 의회의 승인을 통해 마련해 둔 것입니다.

다음으로 ‘승인실행지침’과 ‘가이드’는 법규제를 이해하고 준수할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승인실행지침의 경우 사업주가 의무를 게을리하여 사고 발생 시 재판에서 인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승인실행지침도 일선 현장에서 잘못 이해하여 적용하는 경우가 있어 가이드로 대체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과거 영국 정부도 지시적(Prescriptive) 규제 중심으로 안전보건관리를 주도해 왔습니다. 당시 지시적 규제는 방대하고 상세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수많은 사업장의 위반사항을 적발해 내기 위해 많은 수의 감독관이 필요했고, 기업은 수동적으로 움직였으며, 새로운 혁신기술과 산업 출현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산된 위험과 작업환경의 변화에 정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싹트게 됐습니다. 안전보건법규제(정부)와 기업 노사의 자율안전보건관리(현장)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로벤스 보고서(1972년)를 계기로 목표 지향적 접근방식(Goal-setting)인 일터안전보건법(HASAWA, 1974년)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입니다.

로렌스 웹(Lawrence Webb) IOSH 회장이 올해 협회의 안전보건 목표 등을 설명하고 있다.
로렌스 웹(Lawrence Webb) IOSH 회장이 올해 협회의 안전보건 목표 등을 설명하고 있다.

Q. 영국식 자기규율 예방체계의 특징이 있다면?
민간이 주도하는 영국식 자기규율 예방체계는 광범위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검증 시스템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게 특징입니다. 검증 시스템의 한 축으로 보험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영국은 보험의 기본 원리인 위험분산(Risk pooling) 개념에 입각해 크게 ▲산재장해보험급여(Industrial Injuries Disablement Benefits, IIDB) ▲사업주책임보험(Employer’s Liability Insurance, ELI) ▲공공책임보험(Public Liability Insurance, PLI) 등의 보험 체계를 구축해 놨습니다.

먼저 산재장해보험 급여는 국가가 운영합니다. 근로자가 일하다 아프거나 다치는 것을 국가가 기본적으로 보장하는 사회보험 성격을 갖습니다. 다음으로 사업주책임보험은 사업주의 법적 의무사항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은 민간 보험사에 의해 운영됩니다. 위험관리는 사업주의 의무라는 원칙에 따라 보험에 가입한 사업주는 보험사로부터 주기적인 모니터링을 받습니다.

보험사는 사업장 내 산재발생, 안전조치 등을 종합 검토해 보험료를 올리거나, 보험 가입을 철회할 수 있고 이러한 정보는 민간보험사 간 공유됩니다. 반대로 이들 정보를 통해 사업주 역시 안전보건관리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고, 사업주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공공책임보험도 민간 보험사가 운영하며, 안전보건컨설턴트 등 전문인력의 역량을 제고하고 동시에 업무태만을 견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영국에서 안전보건컨설턴트는 의무적으로 공공책임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가운데, 잘못된 지도 조언 등으로 사업장에 사고나 금전적 피해가 발생할 경우 안전보건컨설턴트 역시 보험료가 오르거나, 보험 가입을 철회 당해 사업 운영에 지장을 받습니다.

요약하면, 민간 분야에서는 사업주, 보험사, 안전보건컨설턴트 등 광범위한 이해관계자 간 검증 중심의 시스템을 토대로, 사고에 대한 과실을 최소화하거나 안전보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Q. 자기규율 예방체계에서 강조되는 요소가 있다면?
새로운 기술도입과 급변하는 작업환경에 발맞춰 사업주가 위험을 합리적으로 개선해 나가고 있는지 보험사에서 검증하거나, 그 반대로 사업주들이 의무를 실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전문인력의 역량 강화가 필수적입니다.

IOSH는 이른바 ‘지속전문성개발(Continuing Professional Development, CPD)’ 프로그램을 개발해 안전보건인들의 전문성 향상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69개의 필요 역량 요소를 골자로 하는 역량개발 체계(Competency Framework)를 구축해 안전보건인들의 나아가야 할 방향성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법적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하지만 민간 등 사회적 합의에 따라 의무에 가깝게 인식된다는 게 특징입니다.

이외에도 IOSH는 지난 2011년 출범한 안전보건컨설턴트 등록기관(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Consultants Register)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수한 전문인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민간의 수요 충족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OSHCR 규정에 따라 안전보건컨설턴트는 CMIOSH(IOSH 공인회원) 등급 등을 취득하고, ‘지속전문성개발’에 참여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종합해보면, 영국에서는 안전보건 전문인들의 육성과 역량 강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운데, 이를 위한 노력이 정부가 아닌 민간 주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로렌스 웹(Lawrence Webb) IOSH 회장이 영국 레스터에 소재한 IOSH 본사 정문에 새겨진 슬로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로렌스 웹(Lawrence Webb) IOSH 회장이 영국 레스터에 소재한 IOSH 본사 정문에 새겨진 슬로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Q. 중대재해 감축을 위해 정부는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현재는 영국안전보건청(HSE)이 공적 부분의 규제기관이자, 통합안전보건관리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먼저 중앙의 HSE와 지방관서(Local Authorities, LAs)가 안전보건 관리감독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HSE는 자체 근로감독관(Inspector)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고위험 업종과 대기업 등에 초점을 맞춰 감독을 수행합니다.

다음으로 지방관서에는 근로감독관이 아닌 환경보건담당관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안전보건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주로 소매, 도매, 유통 및 창고, 호텔 및 외식업체, 레저 산업 등의 업종과 중소규모 사업장을 대상으로 감독을 수행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의 감독 방식은 컨설팅 등 지도·조언에 초점을 맞춘 ‘소프트형’ 방식과 작업중지, 기소 등 강력한 규제 중심의 ‘하드형’ 방식이 사업장 규모와 수준에 맞춰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게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안전보건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업장이 있다면, 초기에는 소프트형 방식으로 안전역량을 제고하고, 이후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하드형 방식으로 전환되는 형식입니다.

단계별로는 ▲1단계(개선점 적발 시 지도조언) ▲2단계(개선통지서 발급, 지도조언 포함, 개선기간 부여) ▲3단계(금지통지서 발급, 지도조언 포함, 개선 전까지 작업중지) ▲4단계(기소, 최대 종신형의 징역 및 무제한의 벌금) 등으로 설명됩니다.

중요한 점은 감독관이 사업장에 지도·조언 등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사업주에게 컨설팅 비용을 청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위험관리의 주체는 사업주이며, 위험관리 서비스 비용 역시 당연히 사업주가 부담해야 할 부분이라는 인식을 현장에 확산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Q. 한국 안전보건 분야에 조언할 말이 있다면?
기업활동과 안전보건 확보 의무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안전보건 확보 의무는 기업 활동에 있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이해관계자 모두가 인지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검증과 전문성 개발, 균형잡힌 투자 등을 통해 사업장 규모와 특성에 맞게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범위 내에서(so far as is reasonably practicable)’ 최대한 적절하게 위험을 관리해 나간다면 한국의 일터 안전보건 수준도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업주의 적극적인 참여와 인식 변화가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단순히 원가 절감만으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산업재해는 국가와 사회에 다양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기업 브랜드 가치 하락, 인력 손실과 그에 따른 신규 채용과 훈련 비용, 조직 분위기 개선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산업현장을 이끄는 많은 사업주들이 안전보건에 대해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투자에 나설 때 기업과 국가 경쟁력 또한 향상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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