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윤(BECHTEL Geotechnical Engineer, P.E., 토질 및 기초기술사)

서창윤(BECHTEL Geotechnical Engineer, P.E., 토질 및 기초기술사)
서창윤(BECHTEL Geotechnical Engineer, P.E., 토질 및 기초기술사)

필자는 한국 건설회사를 12년 넘게 다니다 현재 미국 건설사인 벡텔(Bechtel)에서 엔지니어로 근무 중이다. 미국 현지에서 일을 하다 보면 종종 현장에 파견 나갈 기회가 있는데, 한국과는 사뭇 다른 미국 건설현장의 안전문화에 대해 느끼는 점이 많다.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가 직접 경험한 한국과 미국 안전모의 기능적, 문화적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능적 차이
미국 산업현장에서는 안전장구를 PPE(Personal Protective Equipment)라고 한다. PPE의 대표격인 안전모의 주요 목적은 충격, 떨어지거나 날아오는 낙하물, 부딪침, 감전, 화상에 대해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추락이 별도로 명기되어 있지 않는데, 이는 미국 안전보건청 (OSHA) 1926.100(a)에 규정되어 있다.

미국 현장의 안전모에는 기본적으로 턱끈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근로자가 안전모를 쓰고 안전모 뒤의 레버를 조이면 그 상태로 끝이다. 심지어 대형 건설현장에도 턱끈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미국에서 안전모를 써 보면, 물론 제품마다 다르겠지만, 안전모 뒤의 레버 부분이 한국의 안전모보다 더 내려와 있어 뒤통수를 감싸는 느낌이 든다. 머리를 숙여도 안전모가 쉽사리 벗겨지지 않는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턱끈에 대해서 몇 번 얘기를 해 보았는데 상당수가 턱끈에 대해 불편할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한국의 안전모는 미국의 안전모 목적(낙하, 비래, 감전)에 더하여 근로자가 추락할 때 근로자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추가되어 있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32조 1항에 ‘추락’에 대해 안전모를 착용하도록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근로자가 추락할 경우 안전모가 벗겨지지 않아야 하므로 기본적으로 모든 안전모에 턱끈이 장착되어 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일 경우 안전모가 벗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턱끈을 사용하기도 한다.

필자는 한국의 도로 및 교량 현장에서도 근무를 했었는데, 미국에 와서 안전모 턱끈의 목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곤 한다. “이미 추락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턱끈을 조인 안전모를 이용해서 근로자의 머리를 보호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가? 오히려 추락재해의 발생 가능성 자체를 억제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적 차이
한국에서 안전모는 근로자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본연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하다. 안전모에 별다른 문화적 의미나 개성을 표현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근로자가 신규 현장을 갈 때는 해당 현장이 속한 회사의 로고가 찍힌 새 안전모를 제공받는다. 그리고 안전모에 별도로 부착하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안전모가 깨끗한 편이다. 근로자가 현장에 몇 년씩 오래 근무하는 경우에는 안전모를 몇 번이고 새로 지급받기도 한다. 또한 근로자가 현장을 떠날 때는 안전모를 버리고 간다. 당연히 다음 현장에서 새 안전모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회사별로 안전관리비의 일부는 고정적으로 안전모 구입 비용으로 지출된다.

미국에서는 근로자의 안전모에 각종 스티커가 잔뜩 부착되어 있다. 스티커는 보통 어느 현장의 안전보건교육 이수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근무하는 텍사스 주 휴스턴 인근의 근로자들은 주변의 산업 플랜트에서 안전보건교육 이수를 필한 스티커를 안전모에 몇 개씩 기본적으로 붙이고 있다. 예를 들면 엑손모빌 A 플랜트 현장, 셰브론 B 플랜트 현장 등의 스티커가 안전모에 잔뜩 붙어 있는 셈이다.(한국으로 치면 AA 건설 새만금-전주고속도로 #공구 스티커, BB 건설 GTX-A #공구 스티커 등이 붙어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따라서 미국에서 안전모가 깨끗하면 그 근로자에 대해서 상당수가 ‘당신은 건설 현장 경력이 별로 없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미국 근로자의 안전모에 붙어있는 여러 스티커는 해당 근로자가 여러 현장에서 경험한 경력, 그리고 스토리를 나타내는 자랑스러운 배지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근로자들은 현장을 떠날 때, 때가 탄 안전모를 버리지 않고 몇 년씩 다음 현장으로 계속 가지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의 건설회사가 근로자들에게 안전모를 구태여 새로 지급하지 않는다.

안전모를 두고 한국과 미국의 건설현장은 전체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각론에서 다른 차이가 존재한다. 턱끈의 유무에서부터 안전모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문화적 차이점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현장을 떠날 때 안전모를 버리고, 또 신규 현장에서 새로 지급받는 것이 반복되는 낭비 문화가 이제는 바뀌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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