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재 대표 | 에버랜드안전관리(주)

가을의 끝자락에 서있는 나무들이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진다. 온통 초록 일색으로 치장했던 나뭇잎이 붉은 열정으로 타더니 이제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낮게 부는 소슬바람에도 이리 저리 흔들리며 몸을 맡겨 버리더니 가지를 잡고 있던 손마저 놓쳐 버린다.

짙은 푸름으로 당당하던 잎들이 한 잎 낙엽이 되어 홀연히 사라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가을에 낙엽처럼 떠나버린 김형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슴 속에 다시 한 번 느껴진다.

김형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처숙부 생신에서였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 위였지만 아내와 동향이라는 사실로 처음부터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더구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다보니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김형은 힘든 생산직의 일이지만 맡겨진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던 일은 두건과 보안경, 마스크 등을 착용하고 선박의 탱크에 들어가 쇠의 녹을 벗겨낸 후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비록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든든한 직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며 그 일을 천직으로 아는 모범적인 직장인이었다.

덕분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빈손으로 울산에 내려왔음에도 2층짜리 주택과 고급 승용차, 그리고 경주 근교에 수천평의 과수원까지 사둘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낙엽이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그는 상상 밖의 사건으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아이들과 바람을 쐬러 나가려고 하는데 가게에 나갔던 아내가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금방 뉴스를 봤는데 그의 집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가정집에서 폭발사고라니 믿기지 않으면서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의 집에 도착했다. 잘못된 보도겠지 생각했던 한가닥 기대는 송두리채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보금자리는 시커멓게 모두 타버리고 뼈대만 남은 흉한 모습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로 사고의 발단은 술이었다. 전날 과음으로 늦게 집에 들어와 부부싸움이 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도 부인과 술 문제로 다시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부인이 계속된 소란에 겁이 나 아이들과 함께 옆집으로 피했고, 얼마 되지 않아 폭발음과 함께 집이 화염에 휩싸였다고 한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안 일이지만 부인이 찌개를 끓이다가 깜빡 잊고 피신했는데 계속 가열되면서 렌지의 이상으로 가스가 누출되었다고 한다. 그런 상태에서 전날의 과음으로 술이 덜 깬 그가 쥐포를 술안주로 하기 위해 렌지에 불을 붙이려다가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나에겐 그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생에 대한 고뇌를 자주 나누던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삶과 죽음의 차이를 실감하지 못하면서도 가족들은 그를 경주에 사둔 과수원 한쪽 양지바른 곳에 편히 쉬도록 했다. 노후를 누구보다 편하게 보내겠다던 김형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서 과수원에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빈손으로 객지에 와서 결혼하여 아들딸 낳아 잘 기르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였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임 후에 편안한 전원생활까지 설계하던 김형. 그의 꿈과 희망은 가스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서 한줌의 재가 되어 버렸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일구어낸 모든 것들을 한순간의 부주의로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김형의 사고 못지않게 안타까운 것은 이제 김형의 일생이 나와 내 아내,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서 점점 잊혀져갈 것이라는 것이다. 어제의 일도 오늘에서 잊혀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산업현장에서 동료의 안전사고를 보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잊어버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삶과 죽음의 차이가 안전과 불안전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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