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섭 원장(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제주지도원)

세종대왕의 업적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특히 그의 애민(愛民)정신은 동서고금의 표본으로 남을 만큼 존귀함이 남다르다.

세종실록을 보면 이런 애민정신에 기초한 그의 안전철학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벌빙(伐氷)이라하여 빙고에 저장해둘 얼음을 한강에서 채취하는 작업이 있었다. 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은 두께가 12㎝ 이상 되어야만 해서 작업은 주로 섣달 한겨울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벌빙은 사실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엄동설한에 강가에서 유숙을 하면서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작업을 했던 것이다.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이도 많았고, 작업 중에 물에 빠져 죽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세종대왕은 이런 벌빙의 실태를 알고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세종 13년에 벌빙 시 빙부가 빠지는 사고를 예방하고자 동아줄을 작업장에 종횡으로 매어놓고, 이 줄에 다시 줄을 연결하여 작업자의 허리에 매도록 했다. 오늘날의 안전대를 착용토록 한 것이다.

실로 ‘인명존중을 위한 조상의 얼’에 감탄을 금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세종이 안전보건에 있어서도 대왕이었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헌데 이런 위대한 조상의 얼이 현 시대에 와서는 희미해져버렸다. 이는 비교적 옛 조상들의 생활상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제주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는 얼마 전 제주도의 안전문화 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한 외국인의 편지를 받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제주도의 단독 주택가에는 집안에 주차장이 없습니다. 대신 길 위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집 앞에 주차해도 아무 문제가 없나 봅니다. 그저 자기 집 앞에 남이 주차를 못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집 앞에 장애물을 두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주도의 길은 언제나 좁습니다.

보도를 걸어도 안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보도 위에 항상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이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8월초 여동생이 제주도에 놀러와 보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 옆을 오토바이가 지나갔습니다. 동생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작업현장에서도 안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일전에 저희 집 근처의 한 2층 건물 지붕에서 어떤 사람이 일체의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위험해 보였습니다.

20년 전에 제가 포항에서 일했을 때도 이런 모습을 자주 보았는데, 지금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일본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들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필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치부가 드러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일화가 필자에게 부끄러운 기억만 준 것은 아니다. 잠시라도 해이한 마음이 들 때면 다시금 안전문화 정착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결심을 되새기게 만든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산업재해율 0.69% 달성이라는 획기적인 성과를 창출하였다. 무려 12년간의 0.7%대 정체에서 비로소 벗어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과 같은 안전보건 선진국의 산업재해율이 0.3~0.5%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것만을 목표로 달려왔다. 허나 선진국을 보면 알겠지만 경제성장은 선진국임을 증명하는 기준이 아니다. 경제성장에 더해 복지와 안전 수준이 뒷받침 될 때 비로소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전보건은 기본적인 인권인 동시에 인명존중의 핵심철학이다. 서둘러 이 기본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것에 시간이 걸린다면 우선 안전벨트, 안전모, 안전화를 착용하지 않고 일하는 모습만이라도 우리 산업현장에서 지워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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