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부, 역학조사 전문기관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 개최

역학조사의 신속성 위해 민간개방 필요
신뢰성에 의문, 반대 목소리 터져 나와

최근 산업안전보건분야의 이슈 중 하나는 바로 반도체, 타이어 공장 등에서 발생한 질환의 업무상질병 판정 문제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반도체공정에서 발생되는 발암물질, 타이어공정에서 부산되는 극미세분진 등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유해·위험요소에 대한 측정기준과 건강영향 평가방법 등이 개발되지 못해서 발생된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설치·운영해 업무상질병에 대해 심의 판정하고 있으나, 그동안 판정의 신뢰성 차원에서 꾸준히 문제가 제기돼왔다. 이와 함께 질병과 업무와의 연관성 여부를 조사하는 역학조사가 내실 있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용부는 역학조사 업무를 민간기관에 개방해 역학조사의 전문성을 높인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동안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산보연)에서 전담해 왔던 역학조사 업무를 사실상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것이다.

고용부는 이 정책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지난 16일 가톨릭의대 의학연구원에서 ‘역학조사 전문기관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에는 이채필 고용부 장관, 문기섭 고용부 산재예방보상정책관, 홍윤철 대한직업환경의학외래협의회장 등을 비롯해 학계, 노동계, 경영계 등의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채필 장관은 “산업 현장의 생산 공정이 복잡·다양화됨에 따라 다양한 유해 위험 요인이 발견되고 있다”라며 “기존의 역학조사 체계로는 이런 위험 요인들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이 장관은 “역학조사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민간협력 시스템이 필요하다”라며 “역학조사 업무를 민간에 개방하면 보다 현장 친화적인 역학조사가 실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정부의 역학조사 업무 민간 개방 정책과 관련해서 각계는 어떤 입장을 보이고 있을까. 다음은 이번 토론회에서 논의된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역학조사 업무 왜 민간에 개방하나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의 큰 줄기는 근로복지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민간전문기관이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역학조사와 관련해서 문제 시 되고 있는 부분들을 해결해 나간다는 입장이다.

고용부에 따르면 그동안 역학조사를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직업성폐질환연구소 등 일부 기관에서만 수행함에 따라 조사결과가 나오기까지 평균 99일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긴 처리기간 때문에 산재신청 근로자와 사업장에서 불만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보상과 관련된 개별 역학조사에 치중하다보니 신종 직업병이나 직업성 암과 같은 중대사례에 대한 심층연구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도 민간개방을 하려는 이유 중 하나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 구정완 교수는 정부의 이같은 관점에 동의를 표했다. 구정완 교수는 “역학조사는 근로자 개인에게는 산재보상과 연관돼 있고, 사회적으로는 직업병 예방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의미가 있다”라며 “사회전반의 산업안전보건 수준을 높이기 위해 역학조사 업무 수행에 더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돼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역학조사 기능 확대를 위해서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인력과 예산을 늘리는 방법이 있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관련 업무를 대학의 직업환경의학과나 직업환경의학센터 등 전문성이 보장돼 있는 민간전문기관에 위탁하면 이미 구축된 인프라를 통해 단기간에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역학조사 전문기관 어떻게 활성화 할 것인가

그렇다면 정부에서는 역학조사 업무를 어떤 식으로 민간에 개방할 계획일까.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허브기능을 하도록 하고, 대신 20여개 전문기관에 역학조사 수행 업무를 맡긴다는 것이 고용부의 청사진이다.
문기섭 산재예방보상정책관은 “역학조사 실시가 가능한 인력, 시설, 장비 등의 요건을 충족하는 기관을 역학조사 전문기관으로 지정한 후 3년 단위로 안정적 운영을 보장할 것”이라며 “다만 매년 운영상황을 평가해 문제가 발생할 때에는 지정정지 등을 통해 부실운영을 방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용부는 △역학조사 전문기관 지정 △역학조사 전문기관 운영 및 역학조사평가위원회 관련 고시 제·개정 △기관운영상황 평가 등 전반적인 운영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역학조사 업무의 허브기관 기능을 맡게 된다. 신종직업병, 집단 업종별 사례 등 민간이 수행하기 어렵거나 중장기계획이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또 역학조사평가위원회 운영, 역학조사 매뉴얼 개발·보급, 분야별 전문기관 지원·육성 등의 기능도 맡게 된다.

민간전문기관은 역학조사 위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특정 화학물질에 의한 직업성 질환에 대해 개별 역학조사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역학조사 업무의 민간기관 개방과 관련해서 핵심 사항은 공정성·신뢰성 확보 문제다. 고용부는 이를 위해 역학조사평가위원회로 하여금 전문기관의 역학조사 실시 결과를 심의토록 할 계획이다.

역학조사의 전문성은 필수요소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역학조사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와 관련해 울산대 김양호 교수는 임상의학적 진단과 직업병 진단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김양호 교수는 “특정 질병이 진단되면 직업적인 노출을 평가해서 그 관련성을 평가하는 것이 바로 직업병 진단”이라며 “예를 들어 간질성 폐질환이 진단됐을 경우에는 임상의학적 진단에 머무르지만 석면노출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면 석면폐 진단이 내려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교수는 “질병 외에도 근골격계질환 역시 고도의 전문화된 업무관련성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라며 “임상학적 진단에만 의존할 경우 퇴행성 질환은 산재가 불인정되고, 비퇴행성 질환은 산재로 판정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즉 역학조사가 의학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직업병을 판단하는 것 역시 전문적인 시각에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인하대 임종환 교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의견을 밝혔다. 임 교수는 “최근 직업병은 급성 중독성질환보다는 암, 근골격계질환, 뇌심혈질환 등 만성질환이 늘고 있다”라며 “만성질환 발병에는 직업적 요인, 비직업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질환 발생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의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역학조사 전문기관 ‘신뢰성 의문’

고용부는 역학조사 기능을 민간에 개방해 그동안 제기됐던 문제를 해소하겠다는 방침이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특히 노동계는 역학조사 업무가 민간에 개방될 경우 조사의 신뢰성에서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조기홍 한국노총 국장은 “현재 역학조사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라고 전제하며 “노동계에서 바라보는 핵심은 역학조사 결과가 신속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역학조사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조 국장은 “공공기관에서 실시한 역학조사 결과도 신뢰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민간기관이 이를 확보할 지 의문이다”라며 “자칫하다가는 민간전문기관 책임자의 성향에 따라 직업병 판정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그는 민간개방보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보연의 인력을 늘리고, 독립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조 국장은 산재입증 책임을 근로자가 아닌 사업주가 부담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하면 역학조사와 관련된 문제가 일시에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최명선 국장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민간개방을 반대했다. 최 국장은 “민간에 역학조사 업무가 이양됐을 경우 부실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기업과 결탁해 제대로 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임우택 한국경총 안전보건팀장도 노동계와 의견을 같이 했다. 산재 승인 여부가 역학조사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만큼 역학조사는 전문성과 신뢰성이 확보된 기관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임 팀장은 “질판위의 판정 결과를 보면 역학조사 결과가 거의 그대로 원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며 “민간기관의 전문성, 신뢰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련 업무를 개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서는 “역학조사를 민간에 개방하기 보다는 질판위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번 토론회에서 정부나 학계, 경영계, 노동계는 역학조사가 제대로 수행돼야 한다는 원론적인 부분에서는 뜻을 같이 했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역학조사 업무의 민간개방’, ‘산업안전보건연구원·질병판정위원회의 역량강화’로 시각차를 보였다.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알 수 없으나 근로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정책이 수립·시행돼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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