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모의 세상보기(14)

세상에 진실보다 더 큰 무기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가만히 보면 소위 말하는 유명인사, 즉 명사(名士)들이란 사람들의 양심을 속이는 ‘뻔뻔함’이 도를 넘기고 있는 듯싶다.

그들은 국민들 의식수준을 어떻게 보고 그런 뻔뻔함을 보이고 있을까? 한 전직대통령 가족들의 추한 모습 등 이제 신물이 나는 것은 우선 접어 두고라도, 이 땅에 또 한 차례 광풍(狂風)을 휘몰아친 이른바 ‘이석기 파동’이 그랬고 연이어 모 고위권력층 ‘혼외아들’ 사건이 그랬다.

아직은 모두가 주의 깊게 관망하고 있는 사건들이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들만 가지고도 그들은 국민적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사태에 접어들었다. 솔직하게 반성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설치던 무대를 조용히 내려가면서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땐 굴뚝의 연기’였으면 다행이겠다만….

며칠이면 밝혀질 일들을 그들은 끝내 감추려 들었고 지나가는 삼척동자들이 들어도 웃을 일을 그들은 맹렬히 연출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한 사람은 해쭉해쭉 웃기까지 했다. 그 웃음은 그냥 일반적 미소의 웃음이 아니라 국민을 얕보고 웃는 비웃음 이었다.

또 한 사람은 모 신문 특종기사에 법적대응을 운운하며 정면 돌파의 ‘칼’까지 꺼내 들었다. 해당 기자가 그 정도의 실명까지 공개하며 대서특필로 1면 보도를 할 때는 최소한 형법상의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 책임 정도는 생각하고 심층취재로 자신 있게 보도를 했을 것이다. 그 며칠 뒤 그 신문 속보에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말들이 시중에 회자 되도록 가려진 진실의 속옷을 한 개 더 벗겨 내었다. 이제 자칫하면 알몸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야말로 손바닥으로 해(太陽)를 가리려는 듯한 그런 대응을 했음은 무엇으로 해명 할 것이며, 또 뒷감당은 무엇으로 하려 했을까? 그 조직 내에서도 그를 향한 원망이 속출하고 있으며 엊그제 한 시사 주간지에서는 그 사건을 보도하면서 헤드라인 제목에 ‘XX일보와 그 총장 중에 한쪽은 죽는다’라고 큼직하게 찍어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한 것은 펜(pen)은 칼(劒)보다 무섭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권력의 힘이 세다고 해도 사실과 진실에 근거한 글, 국민의 알권리에 속하는 정론보도에는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는 사실이며 진실은 가려져 있을 때는 모두 거짓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말했다. ‘잠시 동안 여러 사람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진실을 향한 교훈적인 명언인가? 통진당인지 진통당인지? 그 정당의 여성 국회의원 둘도 사회적 비난과 원성이 빗발치니까 반성보다는 상대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부터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연극을 보고 있는 듯싶어 가소롭기까지 하다.

서민들이 피 땀 흘리며 애써 벌어 바치는 세금으로 거액의 국록(國祿)을 받아먹고 사는 힘 있는 고위 공직자들의 뻔뻔함에 구역질이 난다는 서민들이 한둘 아니다.

물론 그들도 신(神)이 아닌 인간이니까 실수도 있을 수 있고 과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뻔뻔함이 자기 보호본능의 차원을 넘었으며 너무 한심해서 국민의 자격으로 한마디 해두는 것이다. 동토의 땅 북한도 이제 조금씩 반성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는가?

우리 산업안전 문제도 그렇다. 가령 어느 현장에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서로 미루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어쩌다 고의나 과실로 잘못을 범한 자는 실수나 과오에 대한 성찰을 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 공부하고 노력하겠다고 해야지 이건 나의 책임이 아니고 어느 상대를 향해 그 사람의 책임일 뿐이라는 식의 발뺌이나 양심을 속이는 일들이 없기를 바란다.

<작가,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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