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말은 1992년 미국 대선에서 클린턴이 부시를 꺾고 대통령이 된 그 선거에서는 매우 주효한 지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까지 한국의 여러 선거판에서도 매우 유효하게 작동하였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는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왔고, 그 덕분에 상당한 지지를 받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런데 그 후 ‘문제는 경제야’는 큰 힘을 발휘하지 않고 있다.

그 현상은 이번 미국 대선 때 그 효과가 잘 입증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바뀐 세상은 적대적 관계가 하나의 주요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분노의 시대인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정국을 보면, 누가 더 좋은 민생 공약을 만들고, 경제를 살리느냐는 사실은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 지난 번 대선 때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그 공약의 대부분을 파기했음에도, 그리하여 민생이 전혀 좋아지지 않았음에도 별로 분노하지 않는다.

경제는 이성이 작동하는 영역일 뿐,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이제 이성과 합리가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꿈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우리의 체제가 경제를 탓하기 전에 이미 독재와 불통에 분노하기 때문이다. 87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이 사회를 휩쓰는 것은 헌정 파괴와 독재에 대한 분노밖에 없다. 경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을까?

사회가 꼭 진보한다는 것을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시민들은 퇴보하기를 바라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이성과 도덕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진보의 시대가 가고 분노와 이기주의의 감정이 휩쓰는 시대가 와버렸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 동안 사회 진보와 민주화에 헌신한 진보 세력은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느닷없이 식상한 정치 세력이 되어버렸다.

진보 세력을 지지하는 수많은 분노에 쩐 국민들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사실, 가장 선명하게 탄핵을 주장하면서 강력한 퇴진 운동을 벌여 왔지만, 정의당이나 사회 운동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5% 정도다. 더 이상 불어나지 않는다. 훨씬 조악한 수준이지만, 분노의 언어를 잘 사용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분노와 혐오의 포퓰리즘을 잘 사용하는 사람의 지지율이 급등해버린다. 그것은 현재의 정국에서 중요한 것은 분노와 혐오의 정치가 이성의 진보 정치를 압도해버리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정치판이 안타깝고 두렵지만, 진보 세력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국이 두렵다.

역사를 보면, 분노와 혐오에 기반을 둔 포퓰리즘 정치가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때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쪽은 항상 진보 진영이었다. 진보 진영이 그런 피해를 당한 것은 그들이 눈높이를 국민들에게 맞추지 못하고, 국민들을 가르치려 들면서 도덕이나 당위를 과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 때에도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공산주의자 지식인들이었다.

국민들이 잘 사는 좋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살아온 진보 진영이 왜 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죄의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당당하지만, 그들 앞에 선 국민들은 초라한 죄인으로 전락당하기 때문이다. 계급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외친 진보에 대해 국민들이 쉬 피곤해 하였기 때문이다. 그 국민들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분노를 동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현실의 분노는 당위성을 항상 짓밟는다. 국민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으로 가자는 게 아니다. 진보의 도덕과 이성의 당위성을 조금 내려놓고, 선명성보다는 유연성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가르치려 하고, 그들을 계몽하지 말고, 그들 앞에 가되 반 보 앞에만 가야 한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가 아니라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의 시대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는 감성이고 그 감성은 분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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