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결국 말하기 방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온 세상이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진영에만 몰두하고 남의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다 보니, 서로 담만 쌓고 지내는 일이 갈수록 심해진다. 자존감이 없어서 말이 천하고, 그 안에 담겨진 정신이 없다. 그러니 말이 싸움을 낳고 또 말이 싸움을 낳는다. 말로 인해 모든 부끄러움이 생긴다. 경쟁 만능주의인 신자유주의가 낳은 극단적 병폐라지만, 다른 나라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다. 전쟁이 끝난 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기적적으로 경제 기적을 이루어서 그런 것인지, 근대 시민사회를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루지 못한 채 독재에 시달린 끝에 그 역량을 아직 키우지 못해서 그런지,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어 있어서 항상 피(彼)와 아(我)를 구별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런 것들이 다 모여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적대적이다. 일상화 된 풍경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성향의 사람들은 비판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목적 지향적이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사람들을 무시하고 적대시 하고, 잘 난 체 하는 것에 함몰되어 있다. 세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논리, 합리, 비판적 이성, 휴머니즘 그런 거 일체 없다. 오로지 세력 결집시키는데 유리하면 무슨 말이든 어떤 행동이든 한다. 또라이 취급을 당하든 닭이라 무시를 당하든 개의치 않는다. 무조건 이기는 게 선이다. 거짓도 괜찮고, 자존심을 팔아도 괜찮다. 누가 돈만 주면 아무 짓이나 다할 수 있다. 영혼이라고 못 팔까?

현재 대통령 권한대행의 일을 하고 있는 황교안 총리가 총리 후보자 시절 때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할 줄 알아야 애국자라 말한 것이 널리 회자된 바 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는 전자에 속한 즉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씁쓸하다.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해야 진정한 애국자라는 말은 전자 진영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전자가 볼 때 생각하는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다. 교회에서 찬양대를 성가대라 치켜 올리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노래를 부르면서 앞뒤 물불 안 가리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을 양성해내는 전략과 동일한 수준에서 이해해야 한다. 매우 치밀한 레토릭인 셈이다. 전자의 진보 진영 사람들이 그의 이 정치적 언사를 적어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니다’는 것을 인정하면 양 쪽은 이 정도로 갈등이 심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이 하는 짓을 논리적으로 독해하면 안 된다. 말하기 자체의 노림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노림수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탓을 하면 안 된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야 갈등이 줄어드는 법이다.

보수 진영이 값싸게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은 진보 진영이 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부끄러움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수사가 진행되는 중, 박근혜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자신이 시키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였다. 세상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더 귀하고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한테는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라면, 지금 그 처지가 어떻게 되었더라도, 한 나라의 최고 지위에 있는 대통령이라면 “그래 내가 지시했다, 나라 하는 일에 맨날 반대만 하는 빨갱이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작성을 지시했다. 뭐가 잘못인가? 대통령이 그 정도도 못하나?” 이렇게 했어야 했다. 비록 법에 저촉되는 일을 했을지언정 국정을 운영하다 보면 할 수 있다는, 그 책임은 자신이 진다는 추상같은 결기가 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없다. 참으로 부끄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가 말한 바대로, 이번 일로 그를 증오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영웅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폐부에 꽂힌다.

결국 말하기 방식의 문제는 아니다. 말이 문제가 아니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문제고,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문제다. 그 말 안에 담긴 것이 없어서 천박하고 그 말을 듣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성마르다. 말이 세상을 만드는 것은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그 말이 무슨 역할을 하는 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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